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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두 종류 (2023년 4월 30일 주일낮설교)

믿음의 두 종류

4. 30, 2023

:역대하 32 9 - 15

說敎:崔仁 牧師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는 선뜻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믿음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히브리서 111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란 말을 Living Bible에서는 "Confident" 신임 받는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그 신임 받는 자가 얻는 실상입니다. 여기서 실상이란 증명이란 말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항상 그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비록 형상적으로 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확증이 있어야한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챤 G. 로세티의 시에 바람(The wind)이란 시가 있습니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Who has seen the wind?)

나도 너도 보지 못하였다(Neither I nor you)

그러나 나무 잎이 흔들리면(But when, the leaves hang trembling)

그때, 바람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Then wind is passing through)

바람을 본 사람 누구인가?(Who has seen the wind?)

너도 나도 보지 못하였다(Neither you nor I)

그러나 나무가 고개를 숙이면(But when the trees bow down their heads)

그때, 바람은 지나고 있는 것이다(The wind is passing by)

누가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그의 마음속에 죄의식이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은 내 곁을 지나가십니다.

누가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이웃의 아픔으로 눈물이 쏟아질 때 그때 하나님은 내 곁을 지나가십니다.

누가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 그 신음 소리를 듣고 통곡할 때 그때 하나님은 내 곁을 지나가십니다.

이것을 이렇게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조용히 가슴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2:26).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믿음의 진정한 속성과 본질을 성경 말씀 속에서 확실하게 찾아보고 우릴 위해 죽으시고 우릴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믿으며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두 종류

(대하32:14-15)

나의 열조가 진멸한 열국의 그 모든 신 중에 누가 능히 그 백성을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너희 하나님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그런즉 이와 같이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꾀임을 받지 말라 저를 믿지도 말라 아무 백성이나 아무 나라의 신도 능히 그 백성을 나의 손과 나의 열조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였나니 하물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겠느냐 하였더라

(대하32:7-8)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믿음의 두 종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앗수르 왕 산헤립의 믿음과 히스기야 왕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믿음은 비단 산헤립과 히스기야 왕의 믿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믿음의 양상입니다. 이제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산혜립의 믿음 히스기야의 믿음

육신적인 믿음(저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 영적인 믿음-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주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믿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

자신의 경험과 힘을 믿는 믿음 자신의 경험과 힘을 부인하는 믿음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믿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믿음

이상에서 비교해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음이라고 말할 때 반드시 이 두 가지 믿음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행기도 타고 배도 타는 것입니다. 이는 그렇게 타고 다녀도 안전할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산헤립과 같은 믿음을 히스기야의 믿음과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해 두셨던 것입니다.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고 말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쫓아하지 않는 모든 것은 육신을 쫓아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모든 행위는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자신의 믿음을 철통같이 의지하고 지금 하나님과 히스기야 왕 앞에서 오만방정을 다 떨고 있는 것입니다.

(대하32:13-15)

나와 내 열조가 이방 모든 백성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열방의 신들이 능히 그 땅을 나의 손에서 건져 낼 수 있었느냐 나의 열조가 진멸한 열국의 그 모든 신 중에 누가 능히 그 백성을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너희 하나임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그런즉 이와 같이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꾀임을 받지 말라 저를 믿지도 말라 아무 백성이나 아무 나라의 신도 능히 그 백성을 나의 손과 나의 열조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였나니 하물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겠느냐 하였더라

산헤립의 이와 같은 오만방자한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잘난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믿는 육신적인 믿음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믿음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지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하였습니다. 이는 산헤립과 반대로 스스로의 군사력을 믿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하32:2-6)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하매 저희가 돕더라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로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퇴락한 성을 중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성의 밀로를 견고케 하고 병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군대 장관들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게 하고 성문 광장 자기에게로 무리를 모으고 말로 위로하여 가로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자신들의 능력과 준비만을 믿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방어하되 절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대하32:7-9)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

(대하32:20)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로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단순하게 비교하여 보아도 산헤립과 히스기야의 믿음은 하늘과 땅이요 육신과 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와 같이 영적인 믿음으로 무장한 종들은 이 세상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대비하되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일어나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믿음의 결과

(대하32:21-23)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얼굴이 뜨뜻하여 그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거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로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되었더라

우리는 흔히들 말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의 성패를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전쟁보다 더 잔혹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에게는 이렇게도 무서운 전쟁이 오히려 축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잔인한 전쟁을 친히 축복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이 나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내겠느냐?”고 호언장담하였던 산헤립을 하나님은 이렇게도 놀랍게 제거해 주셨던 것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하나님은 한 천사를 보내시어 산헤립의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용사들이 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 천사를 보내셨을 뿐인데도 그들의 모든 것들이 초토화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 왕 산헤립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제거하심으로 또 다시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해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도 큰 소리 치던 산헤립이 전쟁도 한 번 제대로 치러보지 못한 채 용사들과 대장들과 장관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천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게 되자 산헤립은 얼굴이 뜨뜻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도 큰 소리 치며 이 세상 그 어떤 신이 나의 손에서 너희들을 구원하여 내겠느냐?”고 호언장담 하였던 그가 그렇게도 비참하게 망하였으니 부끄럽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부끄럽게 고국에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는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남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칼로 산헤립을 죽였던 것입니다.

(대하32:21)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얼굴이 뜨뜻하여 그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인 믿음으로 일어선 앗수르 왕 산헤립의 최후였습니다. 육신적으로 살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도 분명하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히스기야는 저절로 감탄이 쏟아져 나올 만큼 놀라운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대하32:22-23)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거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로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되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산헤립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전화위복의 축복을 체험하고 더욱 더 존귀한 자로 높이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믿음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교훈으로 삼고 제대로 된 믿음으로 무장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축복으로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신령한 믿음으로 무장하여야...

(대하32:7-8)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

(대하32:20)

이러므로 히스기야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로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가 기적을 맛보았던 믿음이었습니다. 당장 엄청난 산헤립이 쳐들어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전쟁 앞에서도 히스기야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도우시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당당하게 버티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었고 그와 같은 놀라운 기도는 결국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과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히스기야와 같은 당당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들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젊음을 믿고 돈을 믿고 출세와 성공을 믿는 산헤립과 같은 육신적인 믿음으로 변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믿음 없는 이 세대를 탄식하셨겠습니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고 착각하지 말고 오늘 우리들도 주님의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솔직하게 엎드려 탄식하며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막연한 산헤립과 같은 육신적인 믿음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히스기야와 같은 영적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없으면 우리들이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는 비참한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친히 기적으로 응답하시는 당당한 히스기야의 믿음으로 이 아름다운 봄의 계절에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새롭게 거듭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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