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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어머니십니까? (2023년 5월 14일 주일낮설교)

누가 내 어머니십니까?

어버이주일

5. 14, 2023

:창세기27: 5 -19

說敎:崔仁 牧師

 

연로하신 분들은 자식농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자식농사를 망쳤다.”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는 등의 말과 같이 말입니다. 자식을 이처럼 농사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열매를 거두기까지는 기나긴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식도 단 기간에 자라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나긴 세월을 통해 자식과 인격이 자라고 효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효성이 깊은 자식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교육하고, 효자가 될 수 있는 인격자로 키우느냐가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결국은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효자를 두게 되던 불효자를 두게 되던 그 책임의 일부분은 자식을 양육한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하게 내가 부모이니 잘 섬겨야 하는 거야!”라는 말은 이 시대에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 두셨습니다.

(12:48-50)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낳았기 때문에 모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잘 키워내야 비로소 모친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는 단순하게 부모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내 나이 80에 자식 때문에 웁니다!”라는 글 하나가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참으로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잘 만나서 사랑을 독차지 하고 유복하게 자라 신문사에 다니는 넉넉하고도 푸근한 남편을 만나 더 바랄 것이 없이 행복하게 살아오면서 두 아들을 낳아 키웠습니다. 큰 아들은 다소 과묵하고 말이 없으나 책을 좋아하여 항상 독서에 힘을 쓰는 아들이었고 둘째는 책하고는 거리가 멀고 사람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의 아들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곧잘 공부를 잘해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의 최고라는 대학에 합격하여 공부하다가 군대에 다녀와서는 바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외국인 기업에 높은 연봉을 받으며 입사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둘째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부모가 형만 좋아하고 항상 네 형은 저렇게 공부도 잘하고 일류대학교에도 들어가고 좋은 직장도 얻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는 말에 화를 내며 가출도 서슴없이 하고 대학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형은 동생의 이와 같은 삶으로 부모님께 근심과 부담을 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매우 싫어하였고 동생도 형의 그 잘난 척 하는 것이 싫어서 형제가 거의 원수와 같이 여기고 함께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둘째가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문제아로 노년이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다가 결혼은 하여 며느리를 보았으나 학벌도, 능력도 없어 제대로 된 직장 하나도 잡지 못하니 아이 하나만 낳고 이혼을 한 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자 다 늙어 아들과 그 아들의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내 나이 80에 자식 때문에 웁니다!”고 말입니다. 오늘은 2023년도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는 자식들로부터 효도를 받기 전에 먼저 자식을 제대로 잘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처럼 늙어서 자식 때문에 울지 않는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잘 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자식을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다

(25:27-28)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 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삭과 리브가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맺어준 귀한 부부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기도하고 며느릿감을 얻되 엄청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확신하며 얻었었고 이삭 또한 리브가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매우 마음에 들어 하였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적인 걱정이나 방법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그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한꺼번에 쌍태를 주심으로 에서와 야곱을 동시에 얻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5: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은 같은 부모 한 배속에서 태어났으나 성격이나 품행이 전혀 달랐습니다. 에서는 용모조차도 붉고 거칠며 들사람처럼 사냥을 좋아하였고, 야곱은 매우 차분하고 조용하며 집안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아들을 아버지는 에서를, 어머니는 야곱을 좋아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편애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성향은 육신적으로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냥이나 좋아하고 육신적인 삶을 선호하였던 에서는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그로 인해 그 소중한 장자의 직분도 소홀히 여기고 한 그릇 팥죽에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같은 엄마의 배속에 잉태되고 태어났으나 찰나의 순간에 장자가 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며 형의 장자의 직분을 흠모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냥하고 배가 고픈 형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팥죽이지만 순순히 내어주지 아니하고 형의 장자권과 흥정하였고 끝내는 그것을 소유하고야 말 정도로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25:29-34)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차이는 결국 에서가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혼이 바로 그랬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배우자를 선택하여야 하였으나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던 에서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이방여인을 배우자로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26:34-35)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부모의 품을 떠나 온 산으로 들로 사냥을 다니면서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았으니 신령한 신앙의 문제는 자랄수록 거리가 생기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소곳이 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니 하나님을 향한 부모님의 믿음과 정서를 닮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적인 가치를 가슴에 새기지 못하면 자랄수록 거리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가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신앙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몸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가치관과 신앙에 대한 괴리가 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어머니의 지나친 욕심이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27:5-10)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리브가는 야곱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도록 강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고 소심한 야곱은 비록 어머니가 강요하시었지만 몇 번이고 불안함을 내비치고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주 받아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저주조차도 내가 받을 테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까지 야곱을 밀어붙였습니다. 흔히 우리들이 오늘날 알고 있기는 야곱이 사기꾼이라 형의 축복을 가로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절하는 야곱을 어머니인 리브가가 몇 번이고 강권하여 어쩔 수 없이 야곱이 순종하는 것으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7:11-13)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머니 리브가의 무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사랑하는 그 아들 야곱을 위해서라면 저주조차도 달게 받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야곱이 복을 받았지만 리브가 자신은 문자 그대로 그 이후의 삶이 저주에 가까운 비참한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대로 리브라가 꾸민 이 일로 인하여 에서는 살기가 등등하게 변해버렸고 결국 야곱은 그와 같은 형을 피하여 멀리멀리 도망가야만 하였습니다. 야곱을 야반도주시킨 이 일과 아버지를 속이도록 한 이 사건을 에서가 모를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날 이후 리브가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야곱은 멀리 떠나 볼 수조차 없었고 곁에 있는 에서는 원망과 분노와 살기등등한 비 신앙적인 아들이 되어버렸으니 그 가정이 더 이상 따뜻한 곳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리브가는 그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밤낮으로 그리워만 하다가 다시는 그 얼굴 한 번 더 보지 못한 채 외롭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자신이 뱉었던 말 그대로 저주스러운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어머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편애의 불행과 욕심의 비참한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짧고도 허망한 것입니다. 그렇게 편애하며 살 것도 없고 지나치게 욕심을 낼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고 따뜻한 사랑으로 오고가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장 소박한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자식을 성공시키려고 욕심내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가슴이 따뜻한 성품을 가질 수 있도록 키워야 하겠습니다. 카네이션 한 송이를 들고 와도 부모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과 존경심이 있다면 억만금보다 더 귀한 것이기에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세 아이를 하바드에 보냈다는 책을 쓴 심활경씨의 책이 요즘 회자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남편이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왔을 때 함께 온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남편이 신학을 전공하였다고 하면 목사였겠고 그 사람은 사모였겠지요.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세 딸을 하바드에 보낸 원칙을 가지고 키웠다고 그 책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칙좋아하는 게 재능이다.” 재능은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데 있습니다. 아이에게 느낀 점을 자주 물어봐 주세요. 그래야 좋아하는 걸 깨닫고, 그 안에서 재능을 발견합니다. 독서는 곧 공부입니다. 책 읽기가 놀이가 되게 해 주세요. 재밌어야 많이 읽고, 그래야 잘 읽습니다.

원칙다르다면 다르게 대해야 한다.” 형제·자매 간 경쟁심을 관리해 줘야 합니다. 아이는 기질·환경에 따라 처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한 아이에겐 더 많은 시간을 쏟으세요. 양육자가 한 발짝 나서서 경쟁 요인을 제거하고, 실패 계획을 세워주는 것도 좋습니다.

원칙주도권은 양육자가 쥐세요.” 세상엔 타협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가르쳐야 합니다. 훈육은 규칙에 따라 일관성 있게 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규칙 안에서는 공부·놀이·친구 등 아이 자율권을 인정해 주세요. 정서적 안정감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녀도 우리들과 똑 같이 미국으로 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자녀들을 길러내서 세 딸을 모두를 하바드에 보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열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식농사를 잘 지은 것입니다. 그것이 책 한 권이 될 만큼 다양하였으니 본 받을 만하지요. 이렇듯 자식은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원칙과 가치관이 자녀들의 가슴 속에 녹아내리도록 수고하고 정성을 쏟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단순하게 육신적으로만 부모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의 롤 모델이 되어야 진정한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나 사도 요한의 어머니처럼 자식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그 자식들이 영적으로 큰 역사를 이루어가는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도 삭막한 마지막 때에 가슴에 사랑이 사막보다 더 메말라버렸는데 무슨 효성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식을 믿음으로 키워놓지도 않았는데 그런 자식들로부터 무슨 신령한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책임이 그토록 크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조건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는 묘한 조건이 하나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을 조용히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특별히 주 안에서라는 말씀을 단맛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곱씹어 보십시오.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무서운 말씀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는 불행하게도 엄마, 아빠처럼 신앙생활 하려면 차라리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는 자식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덕이 되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잘 알고 잘 믿는다고 큰소리 쳐도 자식들이 공감해주고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말짱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이웃에게는 덕이 되지 않는 신앙은 없습니다. 반대로 이웃들이 다 욕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또한 없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리브가의 삶을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야곱이 도망간 다음 에서가 그 어머니를 공경하고 사랑하였겠습니까? 야곱을 꼬드겨 자신의 축복을 강탈해 가게 한 그 어머니를 과연 에서는 사랑하고 섬겼을까요?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지금 아들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신령한 축복을 얻기 위해 네 식구밖에 되지 않는 가정을 풍비박산이 나도록 망가뜨려 놓았는데 그 신령한 축복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은 이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리브가는 자식농사에 실패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둘 뿐이었는데 그것을 편애하고 큰 아들의 것을 빼앗아 작은 아들에게 주고 그리하여 두 아들이 철전지 원수가 되게 하였으니 잘못도 엄청난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땅에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신령한 것은 결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사랑의 아름다운 관계가 신앙의 기본이 되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로부터 진정한 효도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제대로 된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삶을 먼저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단코 가정의 평안이나 노년의 평안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렸던 내 나이 80에 자식 때문에 웁니다.”는 어머니를 보십시오. 왜 존경 받고 효도를 받으며 편안한 노년을 보내야 할 어머니가 이렇게 눈물로 하소연하고 있습니까? 결국은 편애라는 그릇된 잣대로 자식을 차별하였기 때문입니다. 형에게 반감을 갖게 만들고 그래서 형이 하는 공부를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제멋대로 살면서 자신을 통해 고통당하는 부모를 오히려 즐기는 불효자가 되어버린 것은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하도록 잘 못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든 부모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겠습니다. 효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효도를 하도록 부모 된 도리와 삶부터 먼저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가슴에서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것이지 강요하여 받아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어버이 주일을 기념하여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십대로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169명을 일일이 상담하며 물어본 설문이 나왔습니다. 1위가 고맙다.” 2위가 자랑스럽다.” 3위가 공개적으로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라면 자식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자녀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따뜻하게 사랑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먹고 자란 자녀들만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부모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버이 날이니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용돈 몇 푼 지워주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와 아들이면 나는 우리 엄마와 같은 여자가 결혼 할 것이다.”고 선언하고 딸이면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남자와 결혼할 거야!”라고 외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부모라는 엄청난 책임감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영육간 삶의 모범이 되고 축복이 되는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늙어갈수록 자녀들로부터 존경과 효도를 받으시는 행복한 미래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고귀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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