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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2023년 6월 4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6. 4, 2023

:창세기12:1-9

說敎:崔仁

 

세계적인 테너 가수인 파바로티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빵장수를 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키워 주기 위해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청년기를 거치면서 파바로티의 관심은 오히려 교육에 쏠려 대학에서도 교육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졸업 때가 가까워지자 파바로티가 진로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내심 성악과 교육을 동시에 붙잡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파바로티의 방에 들어가, 방 안에 있던 의자 두 개를 멀리 떼어놓은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 위에 동시에 앉으려면 너는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의자에 앉으려면 반드시 한 의자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은 네 자신이 해야 한다." 결국 청년 파바로티는 심사숙고한 끝에 성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성공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신앙 역시도 선택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선택입니다. 대충 주일만 지키는 크리스천이 될 것인지, 주중에도 진실 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것인지, 이것도 또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전반에 걸쳐서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필요할 때만 적용할 것인가,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슬로베니아 출신 심리학자이며 지금 일본 오사카대학의 교수인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바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하려는 그 하나만을 볼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심사숙고하여 선택을 하여도 우리는 완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숱하게도 많은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비참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은 걸까요? 현충과 희생의 달 6월을 맞아서 오늘은 특별히 인류 최초로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에 관하여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최초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도 그와 같은 인격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풍성한 변화와 축복을 체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친히 선택하실 때에는 거기에 합당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일을 맡기시려면 필수적인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복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어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 받은 제자들의 필수적인 자격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24-26)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저희들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제비를 뽑고 그 중에서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시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처럼 소중한 일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시니 그는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던 것입니다.

(1:17-18)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꼭 집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시키시면 무엇이든지 다 순종하고 따를 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모형제와 본토와 친척들을 떠나 갈 바도 알지 못한 채 순종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로 순종하는지 친히 그를 시험하시고 그 증거를 성경에 기록하여 두셨습니다.

(22:1-3)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 땅에 그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명령을 두 말 않고 그대로 따라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오늘 우리들이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만들어 내는 가장 무서운 형벌의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단순한 신자들의 덕목이 아닌 신자가 존재하는 바로 그 이유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4:18-22)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11:8-1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위의 말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75살이라는 고령에도 갈 바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고향을 떠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백 살이나 되어 도무지 자식을 가질 수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니 자식이 나올 줄을 확신하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그 믿음에 걸 맞는 엄청난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될 줄 확신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였던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남자와 자본적이 없었던 처녀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배속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이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소식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그녀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는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른 여인네는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가혹한 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일이라면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1:34-38)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교인들이 나는 믿음이 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들이 듣고 있는 아브라함과 마리아의 믿음일까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바가 되어야 합니다. “소자야, 네 믿음대로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말자 기적으로 응답이 나타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9:28-31)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된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코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가 응답되고 하늘의 축복을 넘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능력을 만들어 내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마지막 때에 우리들에게 믿음이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막연하게 믿음이 있을 것이란 착각을 버리고 날마다 먹는 음식보다도 더 믿음을 귀하게 여기며 사모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은 사랑과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18:1-5)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 사건은 매우 놀라운 기록입니다. 훗날 히브리서 기자가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기억하고 성경에 남겨두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13: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용하시는 인물정도면 필수적으로 이와 같은 사랑과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비슷하여서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더 앞서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뛰어 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집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집 맞은편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곳까지 친히 달려 나가 그분들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렇듯 성도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빼어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남들이 다 비난할 때 품을 수 있어야 하고 남들이 다 욕할 때 변호해 줄 수 있어야 하며 남들이 다 정죄할 때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에 띄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빼어난 사랑으로 천사들을 대접하고 평생토록 가지지 못하였던 아들을 허락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낌없는 사랑에는 반드시 화답하시고 보답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나사로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사 복음서 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대접한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유난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친히 달려가 주시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려주셨을 뿐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거나 선택하시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숨은 비밀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깊은 사랑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네가 잘났느냐, 내가 잘났느냐를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으로 덮어주고 일으켜 세우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받들어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바로 사랑의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리도 넘쳐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이 데리고 나왔던 롯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들 하나 없이 늙어 고향을 떠나 나와야 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롯을 자신의 아들보다 더 챙기고 거부가 되게 해 주었습니다.

(13:8-11)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이렇게 롯이 늙은 삼촌의 배려조차 알지 못하고 삼촌이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하고 가라고 한다고 해서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이 그곳으로 간 다음 주변 왕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숨을 걸고 달려가서 롯을 구해냈습니다. 주변 나라 4개국의 왕들이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으로 자신의 가솔들만 이끌고 불구덩이 같은 전쟁터로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14:11-12)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기적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브라함은 롯을 구해냈고 자신의 생명과 가솔들의 생명 또한 지켜냈습니다.

(14:14-16)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의리입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 나와 함께 하는 사람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고 지켜내는 사랑이 바로 의리입니다. 그래서 의리는 배신의 반대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크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커녕 그와 같은 배신자는 인간이기도 포기한 자라 이 세상에서도 스스로 고립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배신자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이기를 원하고 인격자이기를 원한다면 의리가 있어야 하고 천만금을 준다 해도 배신하지 않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를 선택하시고 불러내시어 기적 같은 하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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