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Wed0508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포기하라! (2023년 6월 25일 주일낮설교)

포기하라! (2023년 6월 25일 주일낮설교)

포기하라!

6. 25, 2023

:창세기13 : 8 - 17

說敎:崔仁

 

[희생자 시신 수습 가능성에 대해 해안경비대 측은 해저 상황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며 말을 아꼈다. 잠수정에는 타이태닉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뭉친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5명이 탑승해 있었다. 타이태닉 잔해 탐험 상품을 운영한 오션게이트 공동 창업자이자 잠수정 운항사인 미국 국적의 스톡턴 러시(61), ‘액션애비에이션의 회장이자 기네스기록 보유자 영국 국적의 해미쉬 하딩(58), 프랑스 국적의 해양 전문가 폴 앙리 나졸레(77), 파키스탄 재벌인 샤자다 다우드(48)와 그의 아들 술레만(19) 등이다.

특히 러쉬 씨의 아내 웬디 러쉬 씨가 실제 111년 전 타이태닉호에서 함께 숨진 스트라우스 부부의 고손녀로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스트라우스 부부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타이태닉호 사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연이다.

한편 1997년 영화 타이태닉 제작 과정에서 여러 차례 타이태닉 잔해 탐사에 나섰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날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타이태닉 참사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선장은 반복적 경고를 무시하고 달도 없는 밤에 전속력으로 얼음 밭으로 돌진해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또 그 경고를 무시한 매우 유사한 비극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이탄 잠수정이 여러 차례 안전 우려 경고를 무시하고 잠수를 감행했다는 지적을 언급하며 안전 불감증을 비판한 것이다.](2023622일자 동아일보에서 발췌)

지난 18일 오전 8111년 전 해저에 침몰해 있는 타이태닉호를 탐험하기 위해 이 잠수정이 출발하였는데 이렇게도 허무하게 세계적인 갑부들이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지적과 같이 타이태닉이나 잠수정은 한결 같이 주변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고집을 포기하지지 못한 까닭에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타이태닉의 선장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는 도에 넘는 자신감을 가지고 칠흑 같이 깊은 밤에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빙산과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주변을 지나가던 배들이 빙산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무전을 여러 차례 보내왔지만 다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침몰하였고 1500여명이란 소중한 생명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이는 잠수정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혜로운 한 직원이 아무래도 이렇게 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고 여러 차례 경고를 하였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 직원을 해고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 회사 창업자와 세계적인 부호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안전 불감증에 대한 집착과 돈에 대한 집착이 결국 이렇게도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집착하지 말고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삶의 모든 화와 복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과감하게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아는 영적인 덕을 쌓아가야 하겠습니다.

성군 다윗은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해서 신하를 죽이면서 까지 취하였던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병들자 그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일주일 동안 금식을 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리며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이 결국 숨지자 그 즉시 식사를 하고 정상적인 업무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아이가 단순하게 아프기만 하여도 식음을 전폐했던 다윗 왕이 그 아들이 죽었으니 어떻게 하실까 노심초사 하고 있던 신하들이 깜짝 놀라 다윗 왕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의외로 태연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삼하12:21-23)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주제로 아브라함의 포기에 관하여서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무엇을 어떻게 포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총과 보상을 덧입었는지 마음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부모형제를 포기하였습니다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우르에서 아버지와 함께 우상장사를 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은 그와 같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입니다. 결국 그는 엄청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부모형제를 떠나야 할는지, 평생 함께 살아왔던 부모형제와 고향에 그대로 머물러야 할는지로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어느 것이든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택하였을 것입니다. 나이가 벌써 75세인데 그 늙은 그 나이에 부모형제와 고향을 포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고향 땅과 부모형제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보는 바와 같이 선택에는 포기가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현실에 집착하고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런 삶으로 계속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큰 결단으로 부모형제를 포기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 없이 외롭게 늙어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나이 백 살에 얻게 되고 그를 통하여서 큰 민족을 이루어 이스라엘 민족의 대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1:1에서도 아브라함이 어느 정도 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기적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인류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먼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이라는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과감하게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용기와 믿음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름진 땅 소돔성을 포기하였습니다

(13:9-10)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아브라함은 참으로 의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향을 떠나올 때 외로워서 그랬는지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자신을 따라 과감하게 고향과 부모형제를 떠나 준 조카에게 아브라함은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친 자식 못지않게 잘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브라함 자신도 조카 롯도 거부가 되었을 때 서로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든지 그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주었습니다. 그러자 롯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눈에 좋게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하고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물이 풍부하고 기름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얼마든지 먼저 이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조카를 위해 그 땅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삼촌과 달랐습니다. 한 번쯤은 삼촌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선택권을 드릴 수도 있었겠지만 롯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람인지라 서운하였던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아브라함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면서 사방으로 열려 있는 더 큰 땅을 주셨던 것입니다.

(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심하신 사랑과 배려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거의 모두가 이기적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서운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평생 키워낸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서운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식들도 몰라주는 부모의 마음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다 아시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소돔 땅을 아브라함이 먼저 포기하고 조카 롯이 선택하도록 내 주었을 때 하나님은 동서남북과 종과 횡으로 뻗어 있는 더 귀하고 좋은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나중에 우리들이 아는 바와 같이 롯이 선택했던 그 소돔 땅은 죄악의 도성이 되어버렸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 롯은 빈 손들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사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욕심과 아집을 던져버리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에 얻은 아들도 포기하였습니다

(22:1-3)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도 부모형제와 고향을 포기한 채 떠나 나왔고 기름진 땅도 포기하고 조카 롯에게 주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적 같은 축복으로 동서남북과 종과 횡으로 연결 되는 놀라운 땅과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귀한 아들 이삭을 요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때같은 아들 이삭을 장작더미 위에 각을 떠서 올려놓고 불로 태워 바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야 말로 아브라함은 엄청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이 백 살에 얻은, 지구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들 이삭을 선택하여야 하겠는지. 그 아들을 주셨던 하늘의 하나님을 선택해야 하겠는지 결단하여야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22: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에게는 생각해 보고, 기도해 보고, 라는 등의 구차한 변명이나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 날 새벽에 이미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아들 이삭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묵묵히 사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서슴없이 칼을 들고 아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22:8-10)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라면 이처럼 과감하게 아들 이삭이라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다급하신 분은 오히려 하나님이셨습니다.

(22:11-12)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아는 아브라함은 오늘 우리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아들을 포기할 수 있는 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랬습니다. 그는 나이 백 살에 얻었던 그 천금 같은 아들 이삭도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라는 놀라운 축복으로 아브라함에게 보상해 주셨던 것입니다.

(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오늘 우리들의 눈썹과 머리카락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실 정도입니다. 그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이와 같이 천하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 용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포기라는 말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61세밖에 되지 않은 잠수정 사업의 공동창업자 스톡턴 러쉬는 타이태닉호를 탐방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톡톡히 제미를 보았습니다. 한 번 갔다 오면 백만 불이 들어오고 그것도 서로 가겠다고 부호들이 줄을 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여러 번 해 보았습니다.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험하다고 쫑알대는 직원을 단번에 해고시켜버리고 지속적으로 탐험을 계속하여 왔습니다. 그 돈 맛에 그는 이미 취해버렸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의 그 사업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많은 돈을 지상에 모아두고 자신은 그렇게도 깊은 수중 4000m에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포기와 집착은 네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거리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먼 것입니다.

실제로 파키스탄의 부호 샤자다 다우드(48)는 아들 술래만(19)을 데리고 갔다가 참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우드의 누나에 따르면 조카 술래만은 수중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가지 않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저 탐험을 거의 광적으로 좋아하는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릴 수 없어서 겨우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그가 조금만 더 과감하게 이번 여행을 포기할 수 있었다면 그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재물을 두고 이제 겨우 열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 이처럼 참담한 비극을 맞고야 말았으니 포기의 소중함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도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채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과감하게 포기하고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