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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인생들의 자화상 (2023년 7월 2일 주일낮설교)

허망한 인생들의 자화상

7. 2, 2023

:요한복음6: 6 6 - 7 1

說敎:崔仁

 

[어머니 장례식 날 아버지를 때려 숨지게 한 50대 아들에게 대법원이 중형을 확정했다.

대법원 3(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존속살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모(55)씨 상고심에서 징역 2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연령, 성행, 환경, 피해자와의 관계, 범행 동기, 수단, 결과 등 기록된 여러 사정을 살펴보면 원심이 27년형을 선고한 것이 심히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해 625일 새벽 80대 부친을 때려 사망케 한 혐의 등을 받는다. 전날은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는데, 김씨는 장례식장에서 술을 마신 뒤 아버지의 주거지를 찾아가 뺨을 때리는 등 폭행했다. 장례식 부의금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고 아버지가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 채 부동산을 매도했다는 게 이유였다.

아들의 폭행에 아버지는 집 밖으로 도망쳐 봤지만, 김씨는 아버지를 다시 데려와 폭행을 이어갔다. 이후 2시간 동안 계속된 범행에 아버지는 결국 현장에서 숨졌다. 사인은 갈비뼈 골절 등 다발성 손상이었다. 김씨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야 현장을 빠져나왔다.}(2023630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

인간은 어느 정도로 잔인할 수 있고 얼마만큼 비인간적일 수 있을까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처럼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기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위의 사건처럼 짐승보다도 못한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예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와 같은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결론을 내린 것은 이와 같은 인간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오늘 우리는 인간의 허망한 본질을 찾아 공부하면서 예수님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롭게 허락하신 7월의 첫 번째 주일에 귀한 말씀을 통해 신선한 변화와 결단을 만들어 내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류 최소의 사람 아담의 자화상

(2:21-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원래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무상으로 주신 에덴동산에서 혼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자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 여자를 본 순간 그는 너무나도 만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사랑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했던 그가 바로 그 여자가 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받아먹고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임하시자 갑자기 돌변하여 그 여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파렴치한 남자로 변해버렸습니다.

(3:11-12)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외로운 그에게 여자를 친히 만드시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 왔을 때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며 그렇게도 좋아하더니 이제 와서는 바로 그 여자 때문에 내가 잘못되었노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여자에게만 책임을 떠넘긴 것이 아닙니다. 그 여자를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께도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분명한 진리 하나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결코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 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에!”라는 구차한 변명은 그 어떤 것으로 포장하더라도 초라하고 구차하고 못난 짓입니다. 책임질 줄 아는 사림, 바로 그 사람이 인격자요 거듭난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말이나 행동 등 결정하는 모든 일에서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멋쟁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아름답고 살 만한 천국의 모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탠리 존스 박사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 특권은 곧 죄다.”고 하였습니다. 영국의 런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티라는 미술가가 그린 충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옛날 로마의 한 도시였던 폼페이(Pompey)의 베스비어스 화산이 터져 폼페이시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온 성내 사람들은 물밀듯이 피하여 도망가는데 성문을 지키는 군인은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성문을 지키는 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 뜨거운 화산의 용암을 맞으면서도 창을 짚고 굳굳하게 서 있는 그림입니다. 이는 그 얼마나 책임감이 넘치는 충성된 군인이었던가를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 있는 교회묘지에 엉뚱하게도 충견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를 한 마리 기르다가 주인이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고 난 뒤에도 그 개가 주인의 묘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안 떠나고 강제로 끌어내려고 해도 떠나지 않기에 동네 사람들이 그 개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그마치 14년 동안 그 개는 주인 무덤을 지키며 머물고 있다가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충성스러운 개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충성스러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천사도 흠모하는 우리들의 직분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충성하고 맡겨주신 사명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최고로 여기셨던 다윗 왕의 자화상

(삼하11:6-17)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해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의 어떠한 것을 묻고 저가 또 우리 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니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다윗은 이렇게도 어처구니없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마치 이 말씀은 검사가 기소장을 기록해 놓은 것과 같이 다윗이 과연 무슨 짓을 하였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탐했던 남의 여자가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도 여러 방면으로 기지를 동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아라는 충신이 너무나도 신실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자 다윗은 결국 그렇게도 자신과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적진으로 보내어 고의적으로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탐욕입니다. 다윗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그와 같은 권력을 이용하여 신실한 충신의 아내까지도 빼앗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욕심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와 같은 욕심이 결국은 죄를 만들고 그 죄는 결국 사망으로 이끌고 말기 때문입니다.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타락한 아담이 책임회피를 하였다면 타락한 다윗은 탐욕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탐욕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장수라는 특별한 축복을 보장해 두셨던 것입니다.

(28:16)

무지한 치리 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욕심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들의 전용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욕심을 제거하고 사랑으로 함께 나누며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小貪大失(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런던의 한 악기점에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찾아와 먼지 묻은 헌 바이올린 하나를 내놓으며 배가 고프니 이것을 사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악기점 주인은 동정하는 마음으로 5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녀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사라진 후 주인은 그 고물 바이올린을 켜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랄 만큼 맑은 소리가 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어내고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거기에는 ‘Antonio Stradivari 1704’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그간 행방불명되어 사람들이 200년 동안이나 찾아 헤매던 바이올린의 거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바로 그 바이올린이었습니다. 악기점 주인은 얼른 나가서 그 여인을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무려 10만 달러를 호가하는 명품을 단돈 5달러에 팔아버린 그녀의 무지는 마치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장자권을 팔아버린 것과 같은 짓이요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주일을 범하는 성도의 어리석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처럼 큰 것을 잃고 작은 것을 얻는 小貪大失(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베드로의 자화상

(6:66-68)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 6장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52어의 기적이 기록된 책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남자들만 5천명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광활한 들판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으니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한 소년의 도시락이었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예수님 앞으로 산을 이루고 구름을 이루며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예수님의 기적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비로소 예수님은 이 때를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히브리 민족의 역사에 관해서, 그리고 천국의 양식에 관해서 소상하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담하였습니다. 그렇게도 많았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떡을 먹고 배가 부르고 신비로운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을 보았을 때에는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진짜 복음을 전하시자 모두가 다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들의 현주소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사람까지도 죽이지만 자신에게 별 유익이 없을 때에는 미련도 없이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우두커니 남아 있는 열 두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성질 급한 베드로가 담대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는데 우리가 누구한테 가겠습니까?”하고 말입니다.

(6:67-68)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있으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답입니까?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우리가 그 예수님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과연 이렇게도 시원하게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흔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베드로 특유의 말 스타일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가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한 말이던지,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등의 말이 모두 베드로의 그 유명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였던 그 베드로가 나중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가 벼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그 소중한 사명도 무책임하게 던져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가는 초라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버리고 모두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26:55-56)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예수님 앞에서도 서슴없이 행하는 초라한 삶의 모습입니다. 말로만 모든 것을 다 하는 행동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앙생활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오늘 우리들도 예외 없이 그 때 그 상황이 되면 똑 같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들은 제자가 되었던, 교회의 직분자가 되었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나님께서 가장 총애하시고 또 완전에 가까울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던 다윗과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시고 훈련하셨던 초대교회의 초석이었던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중에 어느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허망한 자화상을 안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라고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부족하고 허물지며 바로 살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우리 모두가 다 허망한 자화상을 안고 초라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 해도 우리가 아니요 못해도 그것이 바로 죄 많은 우리들의 모습이므로 자만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 것이고 서로가 부족하니 도와주고 사랑하며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들의 본질을 똑바로 인식하고 겸손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더불어 하나님의 일을 감감해 가는 그런 거듭난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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