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023년 7월 16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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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6 July 2023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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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7. 16, 2023
本文:고린도후서 6:1 - 10
說敎:崔仁根 牧師
대한민국 고아원에서는 원생들이 만 18세가 되면 일정액의 자립금을 주어서 독립하도록 내 보내게 됩니다. 그 작은 자립금으로 생전 처음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원생들은 적잖이 당황하게 되고 스스로 자립하기 까지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나와 간신히 작은 원룸을 렌트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선배 언니가 고아원에서 나오는 후배들을 자신의 작은 방에서 재우고 먹이며 직장을 구할 때까지 여러 명을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도움을 받고 나간 후배들 가운데서 다시 찾아오거나 전화로라도 감사하다고 연락해 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혼자서 서울로 올라와 10년 동안 빵집에서 일을 하며 빵 기술을 익히고 주인의 인정을 받아 그 가게를 인수하여 간신히 독립을 하였을 때 21살의 청년이 찾아와서 “미안하지만 빵을 외상으로 좀 살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갑자기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세 동생들을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데 돈이 다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빵 사장은 두 말 하지 않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아무런 부담도 갖지 말고 필요할 때 마다 와서 외상을 가져가라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달력을 잘라서 만든 외상 노트를 들고 와서 날자와 금액을 일일이 기록하고 감사하며 외상 빵을 사갔습니다. 그러다 IMF가 닥쳤고 빵가게는 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빚까지 지고 간신히 원룸 하나를 얻어 근근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7년이 지난 어느 날 뜻밖에도 외상으로 빵을 사갔던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외로운 사람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빵가게를 열 수 있는 새로운 건물의 계약서를 내 밀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빚도 다 갚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신 사랑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고 인터넷 샤핑몰로 엄청난 돈을 벋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빵가게 사장은 기적 같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위의 두 케이스에서 어떤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도리입니다. 사람의 은혜도 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지난 두 주간 동안 들었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오늘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겠는지 결단해보려고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던 아담과 다윗이 그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말씀도 저버렸다가 심판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인간답게, 그리고 신자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잊지 않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망각하였던 사람, 모세
(출2:11-15)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죽었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산파가 왕의 명령도 어기고 고상한 거짓말로 모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여인은 강하여서 산파인 우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를 낳았으므로 우리들이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고 한 것이 그러하였습니다.
그 부모가 숨기고 숨기며 키웠으나 더 이상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위험하여 그렇게도 사랑스러웠던 모세를 역청을 칠한 광주리에 담아 누군가가 주워서 키워주기를 소원하며 강가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런데 기적같이도 바로의 딸이 그것을 발견하고 건져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어머니를 유모로 고용하여 돌보게 되는 완벽에 가까운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다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 그 왕의 왕궁에서 모든 문무를 완벽하게 배우며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세보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성장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모세는 스스로 잘나서 왕궁에서 특별하게 자라난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진 특권으로 자신의 민족을 보호하고 구원할 수 있을 것이란 무서운 오판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2장에 나타나는 모세의 살인이었습니다.
(출2:11-12)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모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애굽 사람을 쳐 죽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이 노역하며 고통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애굽인이 자신의 민족을 학대하는 것을 보는 순간 그 아픔이 분노로 폭발하였고 급기야는 쳐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얼핏 보면 이는 누구라도 당연한 모세의 행동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모세는 결국 바로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그 바로의 칼날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매사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신이나 자신의 부모가 위대하여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잘나서 동족들은 온갖 노역과 학대로 죽을 고생을 하는데 왕궁에서 자라고 풍족한 복을 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요 특별하신 축복이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똑 바로 알았다면 자신에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의 민족들 또한 하나님께서 해방하실 것이란 믿음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왕궁에 있는 왕자라고 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처럼 스스로 일어나 자신이 가진 것으로 역사하려고 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죄인 된 인간들이 대신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든 만사를 다 하나님의 주권에 돌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성군 다윗이었습니다.
(시37:4-9)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바로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은 신자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하나님만 기대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객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세는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다리지 못한 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다가 결국 살인자가 되고 도망가야 하는 비참한 결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세월이 무려 40년이었으니 안타깝다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았던 사람, 바울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잔인한 살인마였습니다. 그 유명한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였던 장본인이 바로 사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부르심으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고 그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도 바울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조차도 사울의 그 잔인한 명성을 알고 비록 장님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곁에 가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습니다.
(행9:10-15)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울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바로 그 살인마를 미래를 위해 쓰실 그릇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울은 이렇듯 살인마에서 한 순간에 사도로 돌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고귀한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내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영광과 주권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인만도 개의치 않으시고 성자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인물들 중에 사도 바울과 같이 “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그 은혜에 화답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빌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위하여 이렇게도 완벽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아는 사도 바울만의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단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라서 이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내어버리고 생명까지도 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기꺼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아는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삶이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살아 있는 자체가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127:1-3)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살벌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천진난만하게 학교에 갔던 어린 생명들이 그 무서운 총탄에 희생되고, 온갖 더러운 사상과 죄악으로 영혼이 병들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들, 더 나아가서 우리 한인 동포들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래곤에서는 딸내미 집에서 저녁을 먹고 손주들과 놀다가 자신의 거처인 노인 아파트로 돌아가는 노중에 총을 맞아 절명한 사람이 한인이었고, 시애틀 다운타운에서는 남편과 함께 만삭의 아내가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출근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34세의 여인 또한 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서 숨을 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 솔로몬은 매우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비범한 진리 하나를 시편에 남겨 두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우리들이 일찍 일어나 종일토록 일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고생하는 것 또한 헛되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어 위로하시고 내일의 꿈을 키우라고 자식들을 주시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은 결혼만 하면 얻어지는 것이고 돈을 많이 벌수록 스스로의 능력이라고 자만하는 자들도 많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의 넑두리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자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너무 욕심을 내지도 말고 이웃들과 불화하며 스스로만 잘난 척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늘 밤에라도 하나님께서 오라고 부르시면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조용히 빈손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생들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신 그 엄청난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 밖에 모르는 인간들도 은혜를 잊지 않고 어떻게라도 그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는 시를 남겨두었습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의 탄식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함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안고, 앉으나 서나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대한민국에서는 참으로 민망하고 참담한 뉴스가 사회면을 채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 최진실의 딸이 외할머니를 고소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 없는 그 손녀를 외할머니가 어떻게 키웠을는지 눈에 선한데 이제 좀 성장하였다고 그 할머니를 귀찮게 여기고 법정에까지 고소하였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분노를 일으키는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는 15세, 16세 된 두 소년이 학교에서 성적을 잘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야구방망이로 때려죽인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법원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이들이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어른 법정에 세우고 종신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단면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인간의 모습은 이렇듯 모든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며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날마다 보답할 량으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회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것만이 신자 된 징표이고 인간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아 멘!
[보험금을 노리고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어머니를 살해한 30대에게 법원이 2심에서도 중형을 선고했다. 서울고법 형사 7부(부장판사 이규홍 이지영 김슬기)는 존속살해 및 존속살해 미수 혐의로 기소된 A(38)씨에게 1심과 같이 징역 25년을 선고했다고 15일 밝혔다.
A씨는 작년 9월 23일 인천시 계양구 한 빌라에서 음료수에 자동차 부동액을 타 몰래 먹이는 수법으로 60대 어머니 B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그는 작년 1월과 6월에도 같은 수법으로 어머니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당시 A씨가 겁을 먹고 119를 불러 어머니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A씨는 대출 빚을 새로운 대출로 갚는 일명 ‘돌려막기’를 하다 채권추심업체로부터 사완 독촉을 받고 어머니의 보험금을 노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작년 1월 어머니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상태에서 받은 보험금을 빚을 갚는데 사용하고, 관련 내용을 인터넷에 검색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2심 재판부는 “A씨는 경제적 목적에 의한 범행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며 “피해자는 친딸에 의해 갑자기 생을 마감하고 어떤 주장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며 피고인은 어머니를 살해한 후에도 피해자 행세를 하는 등 정황도 불량하다”고 질타했다.](2023년 7월 15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