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를 부르신 하나님 (2023년 8월 6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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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6 August 2023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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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를 부르신 하나님
8. 6, 2023
本文:출애굽기3:1-12
說敎:崔仁根 牧師
모세가 피 끓는 야심으로 자신의 동족들이 고통 받는 것을 해방시켜 보려고 나섰다가 공연히 애굽 사람만 쳐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도망갔던 세월이 어언 40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초야에 묻혀서 양무리를 이끌며 결혼도 하여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낳고 거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애굽에서 아직까지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기 동족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던 그런 열정이 넘치는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이나 되었고 여전히 살인자로 낙인이 찍혀 있는 초라한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으나 모세는 초라한 자기 자신에 대해 낙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4:10-13)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회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슬하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하시기 전에 그들을 이끌어 내야 할 모세부터 먼저 회복시켜야만 하였습니다. 원래 “회복”이라는 말을 서양 사람들은 Restor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復舊(복구)”입니다. 복구는 망가져 버린 것을 새롭게 고치는 것을 뜻합니다. 水害復舊(수해복구)라는 말과 같이 말입니다. 회복의 달 8월을 맞아서 오늘은 이와 같은 “회복”에 관한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에 귀를 모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회복의 은총을 덧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요3:1-3)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참으로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렇게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죽어 지옥불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지음 받았을 때와 같이 죄 없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Restoration 즉, “복구”이고 “회복”인 것입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모든 문무를 갖추고 어머니로부터 민족애와 신앙으로 무장한 참으로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청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학대당하는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 보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그의 열정은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살인자로 전락하였고 자기 동족들마저도 “우리가 언제 너를 우리들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애굽 사람을 쳐 죽이듯이 우리들도 쳐 죽이려느냐?”는 혹독한 비난만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 순간에 바로의 궁정을 떠나 광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초야에 묻혀 산지 어언 4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어제의 일과 같이 생생하게 살인한 그 때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출3:10-11)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의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실로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는 이 말 속에는 “나는 살인자요 바로 앞에 가는 순간 나는 죽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나를 보자말자 ‘누가 너를 우리들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우리들도 죽이려느냐?’고 대들 것입니다.”라는 자괴감이 서려 있습니다. 그만큼 모세의 머릿속에는 40년 전의 그와 같은 엄청난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절망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출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는 말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의 심중을 깊이 헤아리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셨습니다.
(출4: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소중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회복이 필요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 우리들도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원천적으로 원죄와 자범죄를 가진 죄인들이요, 그 죄로 인해 엄청난 재난과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총신신학대학원 75회 졸업생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곳 서북미에서 우리 때의 총신 출신들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흔한 총신동문회도 이곳 시애틀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벤쿠버에 75회 동기 동창 친구가 한 사람 있었고 올림피아에도 역시 75회 동기 동창 친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벤쿠버에 있었던 친구 조동희목사는 장로가 너무나도 고통을 많이 주어서 결국은 50대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림피아에서 목회 하던 친구도 예외 없이 장로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은 목회를 그만 두고 그로서리, 호텔, 한약방 등 온갖 세상 일로 가족들을 부양하며 고생하다가 3년 전 코로나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양무리를 천국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회자도 이처럼 모진 고통으로 희생이 되고 있다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는 오죽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회복이 필요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우리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고 사랑하여도 살아가기 어려운데 서로 물고 싸우며 원수가 되면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이렇듯 우리 모두는 회복이 필요한 상처 입은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서로 사랑하며 위로와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행1:6-7)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칼과 몽치로 잡아가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잔인한 인간들을 목격하고 졸도할 만큼 놀랐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기 위해 도망을 갔고 행어나 잡혀 자기들도 주님처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요20:19-20)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러다가 이렇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나타나셨으니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이와 같은 악랄한 인간들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새 나라를 세우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늘의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들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어리석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모세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통당하는 동포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는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고 설명해 주시자 너무나도 황당한 질문으로 예수님 말씀의 본질조차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어떻게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요3:3-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최근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끔찍한 칼부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림동에서는 택시에서 내린 한 남성이 길을 가던 사람들을 무차별로 칼로 찔러 한 사람은 죽고 세 사람은 중퇴에 빠졌는데 그 악몽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지난 목요일에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대의 한 청년이 분당의 한 백화점에 나타나 자동차로 인도를 걸어가던 시민을 들이받고 다시 칼을 들고 백화점으로 들어가 14명에게 칼을 휘둘려 13명이 중퇴에 빠진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괴상한 변명만 내 놓을 뿐 정당한 이유조차도 없었습니다. 회복 받아야 할 인간성이 회복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치료 받아야 할 정신적인 문제가 치료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회복되어야만 될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스스로는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살인을 저지르고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후 광야로 도망가 40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으나 “나는 아닙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하고 물러섰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이 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들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처럼 스스로 일어난 자들은 한결 같이 다 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하였으나 하룻밤을 넘기지 못했고 가룟 유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을 갈취하였지만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한 체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그 주님께 우리들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것을 가장 잘 깨달은 사람이 성군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밧세바를 통해서 얻은 아들이 병들자 식음을 전패하고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이 땅에 어느 부모가 어린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밥이 넘어가고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데려가시자 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37:4-6)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고 말입니다. 사는 날 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새김질 해 볼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성도들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십니다
(출3:7-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에서 소중한 진리를 또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우리들의 모든 고통을 친히 보시고 들으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하신 대로 그 고통에서 우리들을 정녕 건져내시고 인도해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누가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지 다 알고 계시며 그와 같은 고통에서 반드시 해방시켜 주신다는 사실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데 지도자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밝히 기록된 바와 같이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게 하겠다.”고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회복시키시기 전에 먼저 그 일을 감당해야 할 모세부터 회복시키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면 우리들의 사사로운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회복시키시고 처음과 같이 복구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살인자라는 오명을 안고 광야에서 40년이란 세월을 보냈지만 그와 같은 끔찍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겨 바로 앞에 보내실 때 그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회복되었고 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회복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살인마에서 성자가 될 수 있었던 비밀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범사에 감사하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충성하였던 것도 하나님께서 살인자인 자신을 복구하시고 회복하시어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사용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똑 같은 사람으로 고통도 느끼고 외로움도 느끼며 이와 같은 귀한 사명을 감당해 갔습니다. 그가 4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온갖 인간들의 배신과 비난과 배척을 받으면서도 굿굿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회복시키시고 기꺼이 사용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충성하고 능력 있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그 자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쥐어주셨던 능력의 지팡이었기 때문입니다.
(출4: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회복이 필요한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들에게는 모세와 함께 하시고 모세에게 능력의 지팡이를 쥐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멋지게 충성합시다. 아낌없이 바칩시다.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회복시키시고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인생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보다 더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줄 알아 날마다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