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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둔 사람들 (2023년 10월 22일 주일낮설교)

심은 대로 거둔 사람들

10. 22, 2023

:창세기22:11-18

說敎:崔仁

 

결실의 달을 10월 맞아서 우리는 심고 거두는 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어떻게 살든 그 삶에 대해 열매를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하셨고 그와 같이 심는 사람들은 돈이나 사람에게 투자를 하며 나름대로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값진 투자는 바로 예수님께 투자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더 내면적으로는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기도 하고 악을 심고 재앙을 거두기도 하며 성령으로 심고 영생을 거두기도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제 오늘은 실제적으로 이렇게 심은 그대로 거둔 사람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무엇을 심고 어떤 인생의 결말을 보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예외 없이 심은 그대로 거두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오,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실천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남은 삶을 지금까지 들은 말씀을 중심으로 소중한 것을 심고 아름다운 것을 거두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순종을 심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거둔 사람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Test해 보셨습니다. 그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순종하는지를 말입니다.

(22:1-3)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순전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 이삭을 바쳐드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아브라함은 전무후무한 위대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는 이슬람과 유대교도들은 지금까지도 피가 터지도록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도들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 낳은 이삭이 진짜 하나님의 대를 잇는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이슬람은 그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드렸던 그 제단을 서로 자신들의 것이라고 목숨을 걸고 보존하고 빼앗으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통곡의 벽 언덕 위에 금색으로 엄청난 돔을 만들고 지금도 신발을 벗어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신성시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렇게도 거룩하게 보존하고 있는 그 돔 안으로 들어가 보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도 소지품을 조사하고 카메라나 휴대폰도 들고 들어가지 못하고 줄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맨발로 들어가 보면 그곳에는 바위 하나만 덩그러니 있으니 놓여있으니 말입니다.

이슬람과 유대교도들이 이렇듯 오로지 자기들의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들만의 종교를 만들어 추종하고 있는 한 하나님 외에는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있는 방도가 이 지구 위에 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전쟁입니다. 이슬람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들만의 알라를 외치고 있고, 유대교도들은 오직 이삭만이 약속의 자손이고 그 이삭을 주신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히 죄인인 입술로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며, “나의 주님이라는 뜻인 아도나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아직도 하나님은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신약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유대교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잘 아는 오늘 우리들로서는 두 종류의 이슬람이나 유대교가 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그 두 종파가 아브라함만은 최고의 하나님의 사람이며 최고의 믿음의 조상임을 인정하고 신처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오늘 우리들의 사고와 믿음을 뛰어 넘는 위대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평생을 통해 아들 하나를 얻지 못한 채 늙어가다가 나이 백 살에 기적 같이 얻은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해서 번제로 바쳐드릴 수 있는 아버지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가장 소중한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아끼지 않는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이 조건 없는 순종을 심고 하나님께서 맹세하시며 내리시는 축복을 받아 자손 대대로 유산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탐욕을 심고 문둥이가 된 사람

(왕하5:20-27)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다음으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였으니 무려 13번 이상이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이는 어쩌다가 이루어 낸 역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선지자를 지근에서 모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영광이요 보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사의 수족 같이 쓰임을 받았던 종이 바로 게하시였습니다. 엘리사하면 상대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게하시일 정도로 엘리사의 이름 곁에는 언제나 게하시의 이름 또한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무엇이 부족해서 황금을 탐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인간은 알 수가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는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기적을 행한다는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과연 엘리사는 예외 없이 그의 문둥병을 깨끗이 고쳐주었습니다. 이에 감사한 나아만은 엄청난 황금을 선물로 내 놓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이것을 곁에서 지켜보던 게하시는 스승과 달리 그 황금이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뒤따라가서 스승 엘리사가 원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스승을 팔고 그것을 받아다가 아무도 모르게 집에 숨겨두고 천연덕스럽게 엘리사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누구입니까? 이미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린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를 그렇게 다녀왔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게하시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여기에 있었습니다.”고 말입니다. 그 순간 스승의 엄한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지금부터 너와 네 후손들에게 임하리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멀쩡하던 게하시의 몸에 문둥병이 발병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습니다.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그 소중한 엘리사의 종의 신분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격리가 된 채 혼자서 쓸쓸히 문둥병을 앓으며 죽어가야만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종으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던 그는 어리석게도 탐욕을 심었다가 문둥병을 거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도 평범하게 누리고 사는 그것이 엄청난 축복인 줄 모른 채 이렇게도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탐욕을 사형에 해당 되는 만큼이나 무서운 죄악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1:29-32)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와 같은 탐욕을 심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심든지 반드시 그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심고 성령을 받은 사람

(10:1-2)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10:44-48)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고넬료는 불행하게도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은 선택 받은 유대인들 앞에서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서로 상종하는 것조차 법으로 금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온 가족들과 함께 끊임 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기도에 관하여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항상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사람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이렇듯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도전 받기를 원하는 부분은 바로 고넬료의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심과 응답하시는 기적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사도가 되었으나 여전히 당시의 풍속과 법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경우에도 이방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그랬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자신의 신분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법으로 이미 막혀 버렸으니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 고넬료의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은 끝내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베드로로 하여금 고넬료의 집으로 찾아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0:28-29)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하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는 이 말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또 어떻게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베드로도 고넬료와 못지않게 항상 정해진 기도시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쉬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영적인 삶에 소중한 부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단순하게 우리들의 필요를 요청하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최고 최대의 교제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꼭 무엇이라 요구하고 응답해야 서로가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등만 기대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끈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들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 공감대를 형성시켜 주는 매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고넬로는 비록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인 베드로를 만나는 것이 법으로까지 금지 되어 있었으나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믿고 끊임 없이 기도를 심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이렇게도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시켜주신다고 하셨는데 고넬료를 통하여서 그 말씀을 응하게 하시고 베드로를 통하여서 원 없이 꿈에도 소원하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게도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를 쉬지 않는 고넬료의 소원을 귀하게 여기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놀라운 구원을 완성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한 폭의 드라마와 같은 아름다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그 어떤 경우에도 소원과 꿈을 접지 말고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이웃을 구제하고 온 가족들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을 끊임 없이 지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긍휼에 한이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아와 주시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기 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수고의 땀을 쏟아내듯이 오늘 우리들도 인내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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