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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사할 수 있는가? (2023년 11월 12일 주일낮설교)

누가 감사할 수 있는가?

11. 12, 2023

:누가복음15:11-24

說敎:崔仁牧師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세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둘째 아들은 감사를 드리며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렸지만 큰 아들은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여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집안으로 들어가기조차 싫어하였습니다. 도대체 이 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들이 일상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주를 넘어선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오늘 우리들을 교훈하시려고 준비하신 말씀이니 가슴을 열고 말씀을 받아서 우리들의 사사로운 편견을 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탕자의 비유에는 누가 감사드릴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는 준비된 인격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흥적으로 하루아침에 감사드리는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격과 믿음을 준비하여야 이렇게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겠는지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배운 그대로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신실한 성도들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예수님께서 친히 어떤 인격과 믿음을 가져야 감사드리는 자가 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에서 그 해답을 남겨두셨으니 함께 공부하면서 감사하는 자의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15:16-17)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인생과 신앙생활에서 깨달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중요함을 뛰어 넘어 절대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깨닫지 못하게 되면 사탄 마귀가 빼앗아가기 때문이요 말씀의 열매를 맺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깨닫는 자는 30, 60, 100배로 결실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타락한 인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자신의 삶이 지옥불로 향하고 있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3:9-12)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는 자는 그대로 자신의 죄 가운데 머물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며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버린 탕자였지만 그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자신의 처지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15:12-19)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비록 그 소중한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여버리고 탕자가 되어 있었지만 그에게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염치없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탕자라고 내치지 않았습니다. 다 탕진해버린 돈에 대한 추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옷을 갈아입히고 손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을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고 거대한 잔치를 벌이시며 못난 자신을 환영하여 주었습니다. 인간이라면 그와 같은 아버지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감사의 역사는 바로 그가 자신과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깨달음에서부터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변화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회복을 위한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와 회복을 받아야 비로소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며 그때의 잘못을 지적하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이렇듯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깨닫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깨달아야 합니다

(15: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 말씀에서는 아버지의 놀라운 깨달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을 이와 같은 경우를 맞았을 때 그 아들의 돌아옴보다는 그 아들이 탕진해버린 재산에 대해 추궁을 할 것입니다. 못난 놈이라고 야단부터 하게 될 것입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쫓아 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단 한 마디도 그 재산에 대해, 그리고 그 아들의 못난 짓에 대해, 염치없이 거지가 되어 돌아온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 아버지는 보통 아버지들과 달리 이와 같은 놀라운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깊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달음이란 바로 아들에 관한 우선순위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그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가치와 지친 그 아들을 보담아 주는 것이 더 소중한 우선순위였음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여기에 기록된 이 아버지는 보통 사람과 다른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보다, 아들이 탕자가 된 것 보다,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온 것 보다 지금 그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지금 내 앞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 생명보다 더 귀하겠습니까? 이 한 마디 질문 앞에 자신 있게 더 귀한 것이 있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깨달음은 생명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우선순위에 놓이게 된다면 싸워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와 같이 말입니다. 오히려 그 생명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이렇게 살아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하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감사가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이처럼 단순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슴에 용서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하지만 불행하게도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큰 아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말아먹은 동생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생을 환영하고 잔치까지 벌이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은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기조차도 싫었습니다.

(15:28-30)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큰 아들을 보고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역시 그는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동생이 살아서 돌아옴에 대한 감사도 기쁨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동생의 존재와 생명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장남이기에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는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 오로지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만이 가장 올바르게 살아가는 존재인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의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지금 절대적인 심판자가 되어 감히 아버지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가 밝힌 그대로 동생이 먹어버린 재산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 동생을 심판하든, 축복하든, 그것은 아버지의 소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그 아버지 앞에서 감히 재판관처럼 동생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이해도, 용서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름장같이 차가운 비판만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집안의 탕자가 어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다보고 계시는데도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재판장이 되어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본도 깨닫지 못하니 감사는커녕 이처럼 원망하고 불평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자상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까지도 원망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성에서 우리는 죽었다 깨도 감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도사리고 있는 마음 밭에서는 감사가 결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끊임 없이 과거에만 매달려 그때의 잘못을 심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과거에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같은 맏아들을 집안의 탕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무리 잘못 하여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축복이 넘쳐나지만 집안의 탕자처럼 자기 의에 빠져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는 작은 가슴으로는 결단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예수님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그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감사는 그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달 11월입니다. 우리들의 인격은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동생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고 살 길을 찾아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신분이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먹을 것이 풍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장남처럼 동생의 과거에 집착하여 현실을 망각해버리고 사랑으로 회복되지 못하는 작은 가슴으로는 결단코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히 아버지까지도 원망하고 판단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감사는 깨닫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둘째 아들과 같이 크게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깨달음이 있는 자에게는 희망과 축복이 넘쳐나지만 집안에서 흠 없이 완벽하게 아버지를 섬겼을지라도 진정한 깨달음이 없는 자는 오히려 자기의 그 잘한 의 때문에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는 탕자가 되고 만다는 오묘한 진리 또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깊은 깨달음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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