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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인격입니다! (2023년 11월 19일 주일낮설교)

감사는 인격입니다!

추수감사주일

11. 19, 2023

:고린도후서9:6-15

說敎:崔仁

 

우리들이 흔히 인격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품위가 요구됩니다. 지적인 능력과 정적인 능력, 그리고 의지적인 능력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품위를 골고루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인격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생명과 구원과 만사를 아끼지 않으시고 다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와 같은 인격자가 되어야만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설사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머리와 이론으로만 알고 가슴이 움직이지 않으면 감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또 머리와 가슴이 움직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그 사랑에 보답을 해 드려야 한다고 느꼈을지라도 의지가 박약하면 감사를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인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3년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나이만큼 감사절을 맞았고 또한 거기에 걸 맞는 감사에 관한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감사절을 보내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3가지의 인간적인 기본자세가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로운 변화와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감사를 드린 인물들의 인격을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제대로 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단순하게 헌금 얼마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변화를 받아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제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후9:6-8)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희생은 바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가장 속 깊은 뜻과 사랑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처럼 소중한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께 오늘 우리들도 그 하나님 앞에서 인색함이나 억지가 아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후하게 드려야 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색함이나 억지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로 후하게 드리는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힘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심으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드리는 예물에 인색함이나 억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즐겨 드리는 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과감하게 드렸습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들의 몸이라도 아니 생명이라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드리는 감사절에 감사예물을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그릇된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들의 생명이라도 드려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감사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나님을 똑바로 아는 지적 능력을 겸비한 인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 인물들 속에서 사도 바울 만큼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과 사명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만큼 감사를 드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 구약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들 보다 더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린 최고의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받은 사랑에 대한 감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후9:10-12)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20:17-21)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사도 바울은 가슴이 따뜻하고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의 두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가슴이 얼마나 사랑으로 감동을 받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헌금해 준대 대해 그는 넘치도록 감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천국의 사명을 주신데 대해 눈물로 충성한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도 살기가 등등했던 그가 오직 겸손과 눈물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은 15절에 밝히 기록된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사를 가슴 깊이 깨달으려면 가슴이 따뜻하고 정서가 풍성한 정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이 가을 낙엽처럼 말라버린 사람은 결코 감동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깊은 감동이 없는 사람은 결코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감사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 눈물이 말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감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만 가지 은혜가 감사하여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중한 사명을 감당하면서 죄인 된 이 종에게 이처럼 소중한 직분을 주셨으니 내가 무엇으로 이 아름다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염려하며 기도와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눈물은 고사하고 그 눈으로 형제의 허물이나 들여다보고 무슨 잘못이 없나 살피며 그토록 하나님은 사랑하라 하셨건만 눈을 흘기며 미워하는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이 시간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메마른 가슴으로는 결단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감사를 많이 드린 사람은 바로 성군 다윗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토록 많은 감사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역시 그는 눈물이 있는 정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늘 눈물을 흘렸던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 되어 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순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었던 인물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사실, 즉 정서가 풍부해야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입니다. 감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의 반사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풍성한 가을의 정점에 우리는 지금 서 있습니다. 잡다한 세상의 모든 욕심과 초라하고 못난 자아를 내려놓고 사랑과 정이 묻어나오는 마음 밭을 먼저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짧디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며 더불어 감사하며 사는 것 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못난이가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성군 다윗을 배워서 무엇보다도 먼저 가슴이 따뜻하고 정서적인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그런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감동할 줄 아는 인격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에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전통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요즘으로 말하면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잘난 줄 알았던 그는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 설 정도로 오만방자하였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렇게도 소중했던 자신의 모든 배경들과 유익했던 것들을 다 배설물과 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그는 결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했던 그가 지금 우리들을 향하여 명령하고 있습니다.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 말입니다. 그는 단순하게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감사함을 넘치게 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에게 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버릴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그와 같은 결단으로 하나님께 감사도 넘치게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결단입니다. 과감한 용기와 결단이 없이는 이 험한 세상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놀라운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마음으로 감사드려야지!” 하는 것으로 감사드릴 수는 없습니다. 감사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결단력이 없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까지도 인색하고 억지가 숨어 있는 형식적인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부모도 없이 외롭고 힘들게 성장하였지만 이 세상 그 어떤 남자보다도 강한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과 유다민족이 몰살되기 직전에 구출해 낼 수가 있었습니다.

(4:15-16)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가 그토록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무서운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목숨을 내어 놓고 죽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스더는 목숨조차도 내 놓았지만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무서운 결단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자 같은 초라한 삶을 살지 말고 에스더와 같은 놀라운 결단력을 가지고 사탄 마귀도 이겨내고 세상의 풍조도 이겨내며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결단력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께 제대로 된 감사를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놀라운 결단이 필요한 인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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