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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사랑입니까? (2023년 12월 03일 주일낮설교)

무엇이 사랑입니까?

12. 3, 2023

:마서5:1-11

說敎:崔仁

 

오늘은 성탄의 달 12월 첫 주일입니다. 모처럼 성도님 여러분들께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질문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잘 들으시고 가슴으로 한 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들은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질문에 예외 없이 혹은 아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렇게 우리들을 사랑하심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사랑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도록 말씀을 준비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만들어 낸 복된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기다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원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옷을 입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들은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서로를 부끄러워하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를 짓고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곧 부끄러움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형제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고 덮어주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형제의 부끄러움과 허물을 덮어주려면 꼭 필요한 덕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영광이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못하지 아니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타고난 본성이 죄인이고 그 원죄로 인해 사는 날 동안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죄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형제의 허물과 죄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죄를 용서해 주려고 하니 그와 같은 능력이 필요한데 그와 같은 능력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범한 다음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수 양을 잡고 그 양의 가죽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거기에 따른 조건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범죄하고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와 같이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미움은 형제의 허물을 들춰내고 부끄러움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미운 가슴으로 형제의 부끄러움을 들춰내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주며 함께 위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닮은 성도라면 당연히 사랑으로 형제들의 허물을 덮어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미움으로 다툼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의 이와 같은 말씀처럼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도 하나님과 같이 아낌없이 주는 그런 사랑을 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우리 인생들의 사랑이 인색하고 형식적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랑은 적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야만 가능한 것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엄청난 희생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친히 시험을 해 보셨습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알아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백 살에 기적처럼 얻었던,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바로 그 아들 이삭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요구였습니다.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런 날벼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친히 표현하신 그대로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독자였습니다. 그것도 다 늙어 나이 백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달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요구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두 말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산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방식대로 그 하나님께 바쳐드렸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2:9-12)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아끼지 아니하고 주는 것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행위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고후9: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바보라도 자신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다 압니다. 어쩌면 말 못하는 강아지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지혜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진실하여야 하고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성탄은 바로 이처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주신 가장 복된 계절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인들은 이와 같은 말씀을 너무나도 많이 들어서 더 이상 감동을 받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의 계절에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상대에게 한 번 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사랑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상대적으로 그 사랑의 가치와 깊이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또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증하신 증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악당들의 손에 이끌려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혀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생생한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엄청난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떤 교인들은 하나님이 언제 나를 사랑하셨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으니 그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땅에 십자가가 있는 한 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들을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직접 증거하고 있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하나님의 그와 같은 뜻을 따라 친히 이 땅에 오셨고 오신 그 목적을 정확하게 아시고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천명하시고 오히려 자신의 몸을 거룩한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요 육신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앞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셨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 아들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렸던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누리고 남는 것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기를 포기하고 몽땅 바쳐드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하늘 보좌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모두가 희생이요 사랑입니다. 우리들도 이 복된 성탄의 계절에 우리들의 가장 소중한 그것을 희생함으로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복된 사랑의 계절에 참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성탄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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