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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3년 11월 17일 주일낮설교 (소망 때문에)

2013년 11월 17일 주일낮설교 (소망 때문에)

소망 때문에

11. 17, 2013

本文:베드로전서1:1-9

說敎:崔 仁 根 牧 師

AD 64년 7월 어느 여름 날 로마의 중심가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대로 폭군 내로 황제가 저지른 방화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불타는 로마시를 바라보면서 춤을 추며 시를 지어 읊을 정도로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곧 이어 군중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그는 그 모든 요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시에 불을 질렀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자비하게 붙잡혀 원형극장으로 보내졌고 무서운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짐승의 밥이 되어갔습니다. 그렇게 되니 로마시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로마를 떠나 피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아시아로 터키로 닥치는 대로 그들은 유랑민이 되어 피신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동굴 속으로, 산속으로 바위틈으로 그들은 몸을 숨기고 피하였습니다. 두 번 다시는 올바른 세상에서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 사도 베드로가 그들을 위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베드로전서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벧전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갑바도기아"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곳은 지금도 터키에 있는 한 비참한 도시입니다. 그곳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바위굴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네로의 횡포와 추적을 피해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피난생활을 했던 그 비참한 동굴로 형성되어져 있는데 땅 속 굴이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햇빛을 볼 수 없을 것으로 각오하고 땅속으로 굴을 파고 피신해 들어갔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산 소망"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살아 있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죽임 당함을 피하여 토굴 속으로 들어간 그들에게 베드로는 "산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우리들의 산 소망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산 소망만 가지면 반드시 능력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들의 산 소망이 진정으로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친히 보여주십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힘겨운 우리 이민생활에 진정한 소망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소망 때문에

참으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현실을 돌아보면 그 어디에도 진정한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은 문자 그대로 절망과 멸망의 소식밖에는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월1일부터 오바마 케어는 시작되었습니다. 자고새면 어느 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 했다는 소식입니다. 2008년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는 마침내 연방정부가 쌋다운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6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도 회복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흘러 2013년도도 속절없이 다 흘러가고 있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희망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지겹고도 고통스러운 소리만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각이 있고 믿음이 있는 미국의 의사들은 지금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의사를 그만 두든지 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의료 활동을 하든지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케어라는 초유의 악마적인 법이 의사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낙태를 시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양심이나 신앙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무조건 오바마 케어라는 법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온 몸으로 겪고 있는 마지막 때의 절망이요 고통입니다. 이런 때에 사도 베드로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오직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님뿐이라고 말입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소망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불확실한 현실에서도 진정한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새롭게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변화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소망의 말씀을 오늘 기대하고 있습니다. 함께 마음 귀를 기울이고 소망의 새날을 기대해 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망 때문에 낮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긍휼이란 쉽게 말하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원하던, 원치 않던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적대적인 관계에서 은총을 입고 회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려면 하나님과 우리 둘 중에 하나는 변화를 입어야 하는데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죄에서 해방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죄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일일이 심판하지 않으시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한 가난하고 초라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기사 하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자 그 여인은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그 여인의 여러 가지 태도를 살펴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떠한 자세로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선 그 본문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이름 없는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무조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여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초지일관 그 소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으로 서운해 하거나 실망하거나 마음이 상하여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런 여자를 위하여서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심지어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搖之不動(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로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만 호소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바로 이러하여야 하는 것임을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여인의 중심의 소원을 친히 확인하신 예수님은 순식간에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들이 낮아지고 불쌍히 여김 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눈곱만큼이라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무시당한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교회까지도 떠나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어떠한 역사를 이루어 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과 비교해 보시고 능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너는 먼저 나로 하여금 너를 불쌍히 여길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벤쿠버중앙교회에 가서 21명의 일꾼들을 세우는데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장로가 6명 안수집사가 6명 권사가 9명이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그들과 함께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그 교회를 섬기던 모 집사님 내외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웬일인가 알아보았더니 지난 장로피택 때 떨어졌다고 교회를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똑 같이 떨어졌던 집사님은 이번에 장로가 되는데 꾹 참고 더 충성하였더라면 지금 반드시 장로가 되었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고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해 왔던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고 저 또한 똑 같은 생각으로 안타깝고 아쉬웠습니다. 주님께 소망을 둔 성도는 결코 이렇게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고 참고 인내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성경에 기록하시고 지금까지 우리들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소망을 둔 까닭에 인간적인 그 어떤 모욕도 참을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긍휼하심과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 때문에 하늘 기업을 바라보게 됩니다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참으로 많은 성도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 땅에서의 기업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하늘나라의 기업보다 이 땅에서의 기업을 우선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할 때 기뻐하시고 땅에 기업은 덤으로 채워주십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그냥 평소에 잘 아는 말씀으로 넘어가지 말고 곰곰이 되새겨 보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이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진짜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들은 절대로 이 땅의 기업을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의 것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우선시 하여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진정한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육신적인 삶을 들의 풀이나 꽃에다 비유하시며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정으로 소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베드로를 통하여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많이 받아 부족함이 없이 잘 살아가나 너무나도 인색하여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풀지 못했던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가 천국으로 들어갔는데 참으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황금보석으로 길이 만들어져 있고 길 양옆으로 서 있는 집들은 보석으로 지어져 이 세상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엄청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숱한 보석 집들을 지나면서 '나도 저 중에 하나에서 살게 되겠구나!' 하면서 감격해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인도하는 천사는 그 좋은 집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라고 지적해 주지 않고 계속 자기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나가니 매우 초라한 집들이 나타나고 천국이 아닌 듯싶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천사가 어느 초라한 집 앞에 멈춰서더니, "이것이 그대가 살 집이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을 쳐다보니 아직 다 완성되지도 않았고 지붕조차도 없는 그런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이 사람은 천사에게 다급히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그 좋은 황금보석으로 지은 집은 아니 주고 이처럼 지붕도 없는 이런 미완성품인 집을 나에게 주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한참이나 그 사람을 처다 보더니,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네 그려. 그대가 세상에서 살 때에 올려 준 돈으로 최선을 다해 지어보았지만 워낙에 경비가 모자라 자네 집이 이렇게 아직 지붕조차도 올리지 못했다네... 세상에서 가졌던 그 많은 돈으로 세상에서만 흥청 되지 말고 이곳 천국으로 부지런히 올려 보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지어 만든 이야기겠지만 왠지 가슴이 아파오는 슬픈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잠시 잠깐만 살다가 떠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오래 오래 살아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고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살아 있는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그곳에 투자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선포해 주었습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 말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이 땅에서는 고통을 당하고 가난하고 힘들지만 우리들이 가서 영원히 살 그곳 천국의 영광은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소망 때문에 하늘나라 기업을 사모하고 이 땅에서의 고난도 능히 이겨내는 멋들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소망 때문에 끝까지 구원을 성취하게 됩니다

(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사도 베드로는 오늘 우리들과 같이 이 땅에서 실패를 거듭하였던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보시는 면전에서 그 작은 생명 하나 보전해 보려고 그 귀하신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돌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주님께 진정으로 소망을 둔 이후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만큼 순순히 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영원을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의 시민이 되는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놀라운 구원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소망하고 원했던 믿음은 결국 우리들도 이처럼 영원한 구원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역사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소망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백성들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의 관심과 소망은 오직 구원에 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난이라도 그 고난을 떠나 진정한 평안과 행복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소망만 있다면 그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난이 우리들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련 독일군들에게 포로로 잡혀 더 이상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던 사람의 고백이 기록에 남아 있어 여기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영국 군인으로 참전하였던 Murdo McDonald 목사가 남긴 기록입니다. 전기 기술자이자 친구인 전우가 라디오를 조립하여 비밀리에 영국방송(BBC)을 듣고 전쟁 상황을 수용소 전우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친구는 제일 먼저 자신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여보게 그들이 왔어, Friend, They have come!"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옆으로, 앞으로 이 기쁜 소식은 순식간에 수용소 전체에 퍼져나갔고 그들은 미친 듯이 마당으로 뛰어 나와 얼싸 안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 소식을 모르던 독일군들은 총부리를 겨누며 욕설을 퍼부어댔습니다. "이 자식들이 순식간에 집단적으로 미쳐버렸나, 왜 이 야단들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떠한 협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쁨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고 독일군은 사방을 둘러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고 사방의 장벽도 그대로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노르망디를 상륙하여 조만간 들이닥칠 연합군으로 인해 해방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들도 지금 우리들의 주변이 전혀 달라진 것 없이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들을 구원시켜 주실 주님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 주님만 오시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우리는 영원히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들을 위협하는 그 어떤 세력보다도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이 더 기쁨이고 바램이고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진정으로 복이 있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은 노래하였습니다.

(시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감사의 계절이 왔다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믿음이 있고 사랑이 넘치며 오늘보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들 속에 세상이 좋아하는 재물과 권세는 없을지라도 이 세 가지 사랑과 믿음과 소망만은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 가지의 진정한 성도의 본질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리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무장하고 사랑으로 실천하며 소망으로 오늘의 고통과 아픔을 이겨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진정한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감사의 계절에 이처럼 기초가 탄탄한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께는 감사로 영광을 올려드리고 우리들의 삶에는 신선한 변화의 회복과 축복을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도 천국을 맛보며 사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쪼록 복되고 귀한 아버지의 날에 아버지의 집에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며 진정한 소망으로 무장하기를 소망하는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안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11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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