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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일 주일낮설교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12. 1, 2013

本文:마태복음6:25-34

說敎:崔 仁 根 牧 師

어느 덧 2013년도를 마지막 보내는 12월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저물듯이 우리 인생에도 언젠가는 12월과 같은 마지막이 다가 올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그 순간에는 깊은 깨달음을 가지지만 그 때는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처럼 12월이 오면 신선한 깨달음으로 삶을 새롭게 하는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와 같은 복된 자가 될 수 있도록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Steven Covey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더십 연구 분야에서 탁월하여 세계적인 연설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분의 최근 베스트셀러 가운데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초두에 자신의 시집간 딸과 나누는 대화가 실려 있습니다. 그 딸은 출가하여 세 번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습니다. 그 딸은 그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하루를 다 빼앗기고 자신의 삶이 없어져버렸다는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빠인 Covey박사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아빠, 저는 요즘 이 아이 때문에 너무나도 속상해요. 아빠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아이 때문에 제 인생이란 아무 것도 없어지고 말았어요. 하루 종일 이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면 너무나도 속상하고 힘이 들어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이렇게 힘들어 하는 딸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습니다. "딸아, 그냥 마음을 편하게 가지렴.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 아이와 함께 즐기렴, 너만큼 그 아이를 돌봐주고 사랑해 줄 사람이 없지 않니? 그러니 지금은 네가 그 아이를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 딸아이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더해 주었습니다. "시간 관리 같은 거 신경 쓰지 말아라. 달력은 아예 잊어버리렴. 다만 지금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이 아이를 즐기도록 하려무나. 네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신경 쓰지 말거라."하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시계는 시간이고 나침반은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코비박사는 사랑하는 딸에게 "지금은 시간보다 먼 인생의 목표를 바라보라"고 충고해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바쁩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쁜 그 모든 일들이 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바쁜 시간에 쫓기어 목표를 상실해버리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삶의 우선순위를 선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에 허우적거리며 떠내려 가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인 12월에 다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함께 듣고 깨달아서 우리 짧은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참 복된 심령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꼭 잡아 할 우선순위를 가장 분명하고도 진실 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공감만 하지 말고 곰곰이 가슴에 두고 곱씹어보면 퍽이나 유익이 되고 또한 축복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므로 친히 주신 말씀이니 가슴으로 받아 삶에 풍성한 유익을 만들어 내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또한 분명합니다.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는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염려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소용없는 일을 염려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명령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염려하는 사람의 유형이 어떤 것인지 성경은 전반적으로 두서너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성격이 소심하기 때문입니다

성격 자체가 소심해서 무엇이든지 염려부터 먼저 하는 사람은 참으로 고치기 힘듭니다. 걱정을 하지 않으면 걱정이 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 종도 무척 소심해서 무슨 일이든지 완벽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평안하지를 못하는 그런 정도이니 참으로 평안을 누리고 느긋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복을 누리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성품을 잘 타고 나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을 읽어 보니 사람마다 혈액형이 있는데 그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O형-오이지-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랄(?)같은 성격

A형-소세지-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랄 같은 성격

B형-단무지-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 같은 성격

AB형-지지지-지랄같고 지랄같고 지랄같은 성격

성경 속에 보면 베드로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은 실로 소심한 사람 같습니다. 한갓 여자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이기 때문입니다.

(마26:69-74)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자꾸만 떠나가신다고만 하시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 보았습니다.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

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말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 십자가에서 속절없이 돌아가시자 베드로는 미련 없이 그 주님을 떠나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요21:2-3)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랬습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매우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그 어떤 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심한 우리 육신을 벗어버리고 담대하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변화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소심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처럼 염려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슴 속에 이처럼 주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염려와 걱정을 몰아내는 그런 믿음이 있는지? 참으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도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에 믿음이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데가 있으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못하면 불안하고 걱정되어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원래 염려란 말의 헬라 원어는 '메림나오'인데 이는 '메리조'라는 말과 '누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메리조'는 '나눈다'는 뜻이고 '누스'라는 말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을 합하면 해석이 나오는데, 염려는 "마음이 나누이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나뉘어지면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부엌에서 예수님을 대접해 드리려고 음식준비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서 예수님과 대화나 하며 행복해 합니다. 이것을 참지 못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동생 마리아를 명하여 나를 도와 음식을 같이 준비하게 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눅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마르다의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왜 우리들의 마음이 이렇게 나누어질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가슴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되시는 것입니다. 돋보기로 태양 빛을 하나로 모으면 순식간에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믿음의 구심점으로 삼으면 무슨 일이든지 염려 없이 거뜬히 해 낼 수 있는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나 다니엘은 죽음이 눈앞에 놓여 있어도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담대하고 강인해졌습니다. 왜입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들을 해칠 수 없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3:16-17)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주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작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며 소심한 우리들이 이와 같은 인물들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도록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염려의 결책은 결단입니다

우리들이 온갖 세상일들로 근심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마침내 결단을 위한 명령을 내리고 계십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의 근심 염려로 나누어지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다잡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는 곧 마음을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주님의 이 한 마디 말씀을 다잡아야 합니다. 일단 우리 마음에 세상의 근심과 걱정 염려가 들어오고 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염려를 먼저 아시고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결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연약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도록 맡겨드리지 못한다면 그 누구라도 염려와 근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과 삶을 다스리게 하면 어리석은 염려와 근심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놀라운 케이스가 있었습니다. 그 장본인은 바로 세계적인 인물 록펠러입니다. 그의 전기를 보면 참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을 품고 결단해야 되겠다는 놀라운 감동을 받을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록펠러는 33세살이 되는 해에 순 수익으로 100만 불을 벌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백만장자가 된 것입니다. 그 후 43살이 되었을 때는 미국에서 가장 큰 회사를 가지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53살이 되었을 때에는 억만장자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가진 부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와 같은 때에 행복하지를 못했습니다. 남이 모르는 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로피셔(Alopecia)라는 병이 바로 그가 지닌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머리가 빠지고 눈썹도 빠지고 온 몸의 근육이 줄어들어 초췌하게 말라가는 희귀병이었습니다. 마침내 의사는 1년을 더 버티기가 어렵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그 말을 들은 그 밤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가진 그 많은 돈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뒤척이다가 전광석화처럼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내 인생에서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에 모든 것이 되신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고 그는 털썩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에 날이 환하게 밝아 올 때까지 그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단하였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겠다고 말입니다. 그 전에도 물론 교회에는 나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까지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진정한 신자가 되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교회당을 지어서 하나님께 바쳐드리므로 자신의 결단을 실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은 교회가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교회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온전한 십일조부터 바치기 시작하였고,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료사업을 하는데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그렇게 신령한 사업에 헌신하는 동안 그렇게도 그를 괴롭혔던 병이 자신도 모르게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잠도 제대로 자고, 식사도 잘 하며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55세를 넘기기가 어렵겠다고 의사는 진단하였지만 그는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록펠러를 통하여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잘 압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음이 평안하고 삶이 윤택하며 무엇이 잘 되면 그 때에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는 날까지 그런 날은 오지 않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왜냐하면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통치하시도록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꿈꾸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들의 염려와 근심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록펠러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셨듯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우리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록펠러와 같이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말씀은 지극히 평범한 말씀 같지만 그보다 더 비범한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러져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자면 록펠러와 같이 비범한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 해가 저무는 이 계절에 이와 같은 비장한 결단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여 주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삶 속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12월 1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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