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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2일 주일낮설교 (목숨도 내 놓은 사람)

목숨도 내 놓은 사람

선교주일

1. 12, 2014

本文:사도행전20:17-24

說敎:崔 仁 根 牧 師

중국의 한 여류 작가가 뉴욕을 방문하였습니다. 길거리에서 꽃을 팔고 있는 한 노파를 발견하였는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추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몇 안 되는 그 꽃을 팔고 있으면서도 그 노파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사한 인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그 노파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인생의 고뇌와 눈물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그 방법을 터득한 분 같습니다."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그 노파는 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삼일만 기다리면 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말을 들은 여류 작가는 조금 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물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삼일만 기다리면 된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때는 악한 이들이 우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장사지낸 바로 그 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이기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으니 삼일만 참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거든요." 이 종은 이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구나! 하고 큰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삶에 예수님과 이렇게 결정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사도 바울 또한 그랬습니다. 그의 삶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계시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그의 담대한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과연 이렇게 선언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 놓겠다는 이와 같은 결단 앞에 그저 숙연해 질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똑바로 알고 믿는 산 믿음의 가장 분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다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은 오직 주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그 주님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뉴욕에서 꽃을 파는 가난한 노파와 같이 웃으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2014년 우리 교회 선교주일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각오로 선교하고 전도해야 하겠는지?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신선한 변화와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목숨도 내 놓은 사람

우리는 지난 한 주간 신년 맞이 특별 새벽기도를 통하여서 새벽마다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특별히 그 말씀 중에 거의 모든 말씀들을 사도 바울의 편지 속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과연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평생을 통해 온 몸으로 겪고 온 영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설파했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말입니다. 우리들도 이제는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확실한 체험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축복이 그 얼마인지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지극히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주님을 위해 순종하자, 헌신하자, 사랑하자고 아무리 외친들 소귀에 경 읽듯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도 바울이 온 몸으로 겪었던 생생한 영적인 체험을 중심으로 말씀을 꾸며 보았습니다. 직접적이 아니면 간접적이라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가슴을 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대로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한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힘은 모든 삶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똑바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행9:1-5)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것이 바로 사울이 바울 되는 가장 극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그가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 그는 즉시 그 주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돌변하였습니다.

(행9:20-22)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도 돌변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울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실 때 이렇게 쓰시겠다고 선언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쓰시려고 사도 바울을 택하셨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그와 같은 뜻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 놓은 채 헌신하였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헌신하였으니 그가 당대에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도로 오고 오는 모든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고 있는 위대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복된 삶의 원천은 오직 생명의 주님을 똑 바로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언제 우리 주님을 이처럼 분명히 만난 체험을 가지셨나요? 신앙생활은 결코 우리 힘이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오직 우리들을 부르시고 만나 주신 주님의 능력으로만 열매를 맺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능력과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사도 바울과 같이 똑 바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헙수룩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의 원고를 책으로 내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내 놓았습니다. 출판사 주인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다니고 있고 비록 그 사람이 출판비용을 다 부담한다 해도 맡을 수 없다고 퇴자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헙수룩한 사람은 원고 뭉치를 집어 품에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데요." 이상스러운 뜻밖의 이 말에 놀란 주인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묻자 그는, "내 이름은 톨스토이입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이 말에 기절할 듯이 의자에서 뛰어 일어난 주인은 급히 사과를 하며 원고를 도로 달라고 부탁했으나 톨스토이는 그냥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복덩어리가 저절로 굴러 들어왔으나 주인이 그만 오만하고 교만하다가 놓쳐버린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들도 이처럼 귀하신 주님을 놓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주님을 똑 바로 만나지 않고는 영원히 영적인 삶은 시작조차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똑바로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자신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똑바로 모를 때는 결코 신앙생활이 가능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커녕 다른 사람을 소개해도 제대로 관계가 맺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16:13-14)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알고 있었던 전부였습니다. 그 모든 대답들은 다 엉터리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게 되셨을 때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고 그러므로 더 더군다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종 스데반 집사님을 무참히 돌로 쳐 죽일 때 사울은 그것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스스로 증인까지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행7:57-58)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러했던 그가 훗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딤전1:13-15)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알고 주님을 만나게 되니 그는 지금 자신의 온 생명을 다 바쳐 그 주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 전하는데 헌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사도 바울에게 주셨던 뜨거운 마음을 주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깨닫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이는 예수님을 똑바로 만날 때만 알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

(눅5:6-8)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바로 보고 바로 알게 되면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같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의 멋들어진 제자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많고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리고 그들 중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이 되어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오직 사도 바울만이 사랑장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체험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단적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은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과 원수된 자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 주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는 그런 사랑이 이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이미 가슴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굴복하고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 놓을 것을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죽음같이 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모든 죄도 다 덮어버립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슴에 이와 같은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상대의 모든 허물을 덮어버리고 불나방처럼 목숨이라도 던져 그 악한 무리들을 사랑하고 품어 안을 때 비로소 생명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최소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 사랑에 감복하여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악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온전히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이와 같은 사랑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돕는 이타주의(利他主義-altruism)의 사랑을 가리켜서 페리커니즘(pericanism)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아프리카에 사는 페리칸이라는 새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페리칸은 새끼를 키울 때 자기의 부리로 그 앞가슴의 털을 모두 뜯어내 피가 나게 해서 자신의 피를 새끼에게 먹인 후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자기 희생의 사랑을 페리커니즘이라고 부릅니다. 그 어떤 생물이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지 않고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식탁에서 흔히 잘 먹는 셀몬이라는 물고기는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에 가서 알을 낳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성장할 때까지 자신이 태어났던 곳에 물이 말라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물고기는 물도 없는 그곳까지 가다가 죽기도 하고 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잡혀 먹히기도 하고 곰이나 다른 짐승들에게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생명은 고귀한 것이고 그렇게 고귀하기에 또 다른 희생을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생명을 구원하기 원한다면 일정부분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진정한 생명 살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올 해 우리교회의 표어는 "받은 은혜에 화답하자!"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은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또 다른 생명을 건져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진정한 가슴의 사랑으로 접근하고 그 사랑을 위한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올 해에는 꼭 한 생명이라도 살리는데 우리 모두 희생양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4년도 선교주일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똑바로 만나고 그 주님 앞에 벌거벗은 듯 서 있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면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신 생명의 은인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을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위해 하나님은 무엇을 희생하셨는지? 가슴으로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그 고귀한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몰라 세상에 젖어서 불쌍하게 죽어가는 우리들의 가족들과 이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와 전도는 단순한 교회의 행사가 아니라 죽어가는 불쌍한 생명을 건지는 고귀한 생명 운동인 것입니다. 한 생명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여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런 멋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선교주일로 헌신하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이라도 내 놓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그런 멋들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2014년 선교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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