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6일 주일낮 설교 (주는 것과 받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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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Wednesday, 19 March 2014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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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과 받는 것
3. 16, 2014
本文:사도행전20:31-38
說敎:崔 仁 根 牧 師
미국에서 가장 좋은 직장 1등에 선택된 회사는 제약회사인 화이저라고 합니다. 미국에 얼마나 많은 기업체와 직장이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최고라면 이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곳의 연봉이 5만에서 8만으로 그리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돈만이 좋은 직장을 선택하는데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돈 보다 더 귀한 것들, 이를테면 업무환경, 직장 상호간의 협조와 존중, 좋은 복지, 미래에 대한 기대 등등의 여건이 어느 직장보다 더 좋은 것으로 판단된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평생을 주고 받으며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지식과 기술과 능력과 시간을 주고 결국은 돈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인생을 다 산 후에는 어떻게 잘 주고 잘 받았는가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로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이것이 결국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평가하게 되는 매우 날카로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겨서 훗날 뒤돌아보고 후회하지 않도록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 어긋남이 없이 훌륭하게 잘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2천 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수많은 성도들의 가슴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다음과 같은 몇 문장에 실어 이 세상에 남겨 두었습니다.
(행20:17-21)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평생을 살아왔던 삶의 철학이었고 현실이었습니다. 그 핵심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고 또한 성도들에게 드렸던 삶입니다. 그의 그와 같은 가치관은 결국 하나 뿐인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놓게 됩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이토록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는 이런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멋들어진 삶은 오직 하나 우리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슴으로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삶의 축복이었습니다.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늘 많이 받아야 복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많이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많이 받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더 못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은 많이 달라고 요구한다고 주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지휘자를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의 말이 지워지지 않고 제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만큼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 말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례를 많이 주면 전공이 살아나서 지휘를 잘 할 수 있는데 사례를 작게 주면 전공이 살아나지 않아서 지휘를 잘 하지 못합니다. 저는 받는 만큼 합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도 이웃교회에서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성탄연합예배 때 그 교회의 연주를 들어보니 우리 보다 훨씬 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교회에서 사례를 많이 주지 못해 전공이 잘 살아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주고 받는 삶! 이것은 매우 평범한 말 같지만 우리들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는 인격과 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과 예수님을 통해 이처럼 주고 받는 삶의 근본을 배우고 실천하여 죽어도 후회 없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냥 삶 속에서 그렇게 좋게 느껴서 불러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바 사랑의 정의는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우리들에게 주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몸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시는 사랑에 도무지 조건이 없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을 감동시켜 줍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주는 데는 조건이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월급을 받는 것은 노동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주는 것이나 받는 것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조건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이처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거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주시면서도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우선 다음 말씀부터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 놀라운 한 말씀가운데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주실 때 우리는 그와 같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 충족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조건 없이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는 것"에 대한 배경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독생자 예수님도 아낌없이 주셨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돌려서 생각해 보면 하나의 해답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고픈 말씀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엄청난 축복을 담보로 우리들에게 친히 명령하십니다. "주라!"고 말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심으로 우리들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너무나도 원하시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다 내 놓았던 것입니다. 다음의 두 말씀을 묵상해 보신다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한 사람이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만 이렇게 하고 실제 삶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그대로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로운 것과 같이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일생을 쫓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 뿐인 생명마저도 주님을 위해 과감하게 내어 놓고 거룩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이처럼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거룩한 삶으로 열매를 맺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에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아껴서도 안 되고 돈을 아껴서도 안 되고 몸을 아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을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일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일4:9-1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말 못하는 나무도 물을 받고 생명을 받은 줄 알고 끊임없이 우리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산소를 내 놓고 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영장이라 일컬음 받는 우리 사람들이 받고도 모른 척 하고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날 신문이나 인터넷 상에서 십일조가 비성경적이라는 논평을 내놓고 있는 자칭 잘난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십일조가 되었든 십이조가 되었던 감사가 되었던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들이 그 하나님께 감사하여 되돌려 드리는 예물에 무슨 명칭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더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하고 힘이 닿는 대로 드리도록 힘쓰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 받은 백성들이 사랑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인색한 마음이나 마지못해 하는 억지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자신의 모든 것 다 드렸던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고후9:7-8)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사랑 받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감동이 되는 말씀입니까? 솔로몬의 일천 번제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더 드리지 못해 늘 마음이 아플지언정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드리는 어리석은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기를 기뻐하고 넉넉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복된 성도들인 것입니다.
열두 살 된 아들과 일곱 살 된 딸을 데리고 단란하게 살아가던 한 가정에 뜻하지 않는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네 식구가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모두가 다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다행히 세 식구는 가벼운 경상을 입었는데 아들은 아주 크게 다쳐 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의사는 수술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수혈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딸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 찾아갔습니다. "수잔, 혹시 말이야. 오빠가 수혈을 받아야 될지도 모른단다. 만약 오빠가 피를 더 필요로 한다면 네가 피를 좀 내 놓을 수 있겠니?"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이제 겨우 7살밖에 되지 않은 딸 수잔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비장한 각오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아빠. 오빠를 살리는 일이라면 제 피를 내 놓겠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후 다행히도 아들은 수혈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호전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시 아빠가 딸에게로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다시 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수잔, 내가 오빠에게 수혈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너는 왜 그렇게도 심각하게 망설였니?"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수잔은 정색을 하며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죽는 일을 앞에 두고 어찌 심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니, 수잔. 죽는 일이라니?" "나에게서 피를 뽑아내면 나는 죽게 되잖아요?" "그럼, 수잔. 너는 죽는 줄 알면서도 오빠를 위해서 피를 주겠다고 한 거니?" "그럼요, 나는 오빠를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내가 죽더라도 오빠를 살릴 수 있다면 제 피를 주기로 했어요." 그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아빠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어떻게 이렇게도 어린 딸이 제 오빠를 살리겠다고 죽는 줄 알면서도 피를 주겠다고 했는지? 가슴이 뭉클하고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단어인가를 가슴이 저미도록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아무리 소중한 것도 그냥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삶은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이제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면서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는 월급에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이 쏟아 붓는 노동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월급이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국에서 얼마 전 있었던 한국철도공사의 파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평균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월급을 더 올려달라고 데모를 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엄청난 국가적 재정 손실을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은 또 의사들이 들고 일어나 진료를 거부하고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수입이 적어지는 정부정책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단이기주의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업주가 이런 상식을 초월한 이기주의자들의 노동쟁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 아예 직장을 폐쇄하거나 사업장을 폐쇄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주나 고용인 모두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가는 직장을 천직으로 알고 이와 같은 좋은 직장이 있었기에 가정도 자녀들도 미래를 향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여 더 많이 일하고 더 열심히 충성하면 과연 어떠한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전자들의 집단이기주의와 전혀 다른 윈윈과 상생의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하늘과 땅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기초는 아주 간단한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받는 것에 대한 은혜 정신"입니다.
다윗은 원래 들판에서 양이나 치고 있었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결코 자신의 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그는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탄식만 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려고 자신이 가진 재산을 과감하게 하나님께 바쳐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받은 것에 대한 정확한 자세입니다.
(대상29:3-4)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대상29:13-14)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숨길 수 없는 다윗의 믿음과 인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천문학적인 재산을 하나님께 바쳐드리고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다시 하나님께 바쳐드린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므로 그는 부와 귀와 능력과 권세와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받는 것에 대한 해답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달라고 조른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속된 말로 받을 짓(?)을 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미도 우리 주님께서 그 분명한 해답을 남겨 두셨습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25:28-31)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신다면 누가 과연 받아 누리게 되며 누가 과연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게 되는지 그 분명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받아 누리는 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만큼의 삶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삶의 근본정신과 믿음이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는 지극히 단순한 대답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신 사도 바울을 한 번 보신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비교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금까지 변화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전15:8-10)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도다운 바울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 될 사람은 끊임없이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며 자신을 정당화시킵니다. 하지만 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은 낮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기적 같은 은총과 축복을 주셨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도 사도 바울과 다윗과 같은 사람의 근본이 되어 있고 하나님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인생 여정 중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고 받는 아름다운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결과를 보면 그렇게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받아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면에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었기 때문에 가난하여지거나 망하는 경우 또한 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근본과 신앙의 문제이지 욕심을 내거나 사모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들에게 주어진 짧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고 말씀하신 바를 사도 바울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따라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이 바로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험상으로 볼 때 주는 기쁨이 실로 받을 때 받는 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이와 같은 근본적인 기쁨을 회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라!"고 말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가고 맙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죽고 나서도 욕을 먹는 것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과 같이 사회에 환원하여 귀한 일도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오로지 기술 개발과 돈만 끌어 모으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이 세상에서 우리는 늘 주는 자가 되어 줌으로 되돌려 받는 그런 멋진 축복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비가 내려와 이 땅에 물이 고이게 하고 그 물에서 다시 수증기를 만들어 비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나누어 주고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이렇게도 멋들어진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귀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을 사모하여 성전에 나온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놀라운 삶으로 더욱 멋들어진 남은 삶을 살아가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2014년 3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