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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4년 3월 23일 주일낮설교 (부르시는 하나님)

2014년 3월 23일 주일낮설교 (부르시는 하나님)

 

부르시는 하나님

   3. 23, 2014

本文:이사야1:18-20

:

 

하나님이 없다고 장담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이 땅에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이 있고 임의단체까지 만들어 하나님을 시인하는 기독교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2008년도 영국 브리테니카 2008년도 연감에 보면 전 세계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 2.3%라나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잉거솔이라고 하는 사람은 무신론자로 유명세를 탄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하나님이 없음을 입증해 준다는 잉거솔에게 은근히 기대까지 걸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침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하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며 있는 목청을 다 돋우어 외쳤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내가 당신을 향해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과 욕설로 저주를 퍼부을 테니 나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게 하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하고는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저주와 욕설로 하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해진 그는 모여든 군중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만하면 하나님이 없는 게 확실하지요?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하나님이 그렇게도 능력이 엄청난 분이라면 자신을 공개적으로 이렇게 저주하는 나를 죽이지 못하고 이처럼 가만히 놓아두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는 게 분명합니다.”고 말입니다. 그 때 군중 가운데서 점잖은 신사 한 분이 나오더니 조용히 외쳤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사람처럼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마음의 사랑이 바다보다도 깊고 하늘보다도 높으신 분이십니다. 어찌 점잖은 어른이 아이가 조롱한다고 죽이거나 때리겠습니까? 저렇게 하나님을 저주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저 자를 죽이시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엄청 큰 사랑으로 우리들을 용서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인간이 있다고 외치므로 존재하시거나 한 인간이 없다고 저주한다고 안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한 말씀으로 선언하시고 말았습니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고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고 말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저 많은 만물을 다 지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도 간단하게 그 해답을 내 놓고 있습니다. “그 모든 만물을 지으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들은 반드시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그 만든 이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본질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막연하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반드시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지 계속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르시는 하나님

 

종교인들이 믿는 우상이나 헛된 신들과 우리 하나님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절간의 부처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절마다 집마다 불교신자들은 불상을 만들어 놓고 그 불상 앞에서 복을 달라고 절을 합니다. 몇 번도 하고 몇 천 번도 합니다. 하지만 그 불상은 전혀 움직이거나 보거나 듣거나 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 불상은 Made in China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불상 앞에 엎드려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불상 앞에 엎드린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남아 쪽으로 한 번 가 보신다면 제가 드리는 불쌍하다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가슴이 답답하도록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가난하고 어리석고 미련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먹지 못해 배가 남산같이 불러 있는데도 그 아이보다 말 못하는 불상 앞에 음식을 바치고 지성을 드리고 있는 모습은 불상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생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들의 삶에 직접 관여하시어 구원과 생명과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들의 삶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계시는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그것을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서 믿음을 만들고 분명하고도 확실한 신앙생활로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 한 것이 있어 칭찬 하시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 짓고 형벌 받아야 마땅한 그러한 상황에서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상한 말고 표현하면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들에게 다시없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타락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린 우리 인생들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들을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은 영원히 원수가 되어 다시는 구원의 소망이 없는 그런 비참한 나락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드리기 위해 다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것이 어리석은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의 근본입니다. 이것으로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형벌을 받아서 죽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친히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3:8-9)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최초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나타나 역사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도 하나님의 그 무서운 명령도 거역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숨어버린 이와 같은 악한 인생들을 부리시고 계실까요?

 

[1] 그들이 못나도 하나님의 것이니까 부르십니다

 

이 땅에 있는 많은 부모님들이 못난 자식들 때문에 늙은 인생을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남들은 인간도 못된 그런 자식 뭣하러 곁에 두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까지 망치느냐고 핀잔을 주지만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난 자식들보다 못난 그 자식 때문에 더 마음을 쓰고 안쓰러워하고 가슴 아파 합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그 못난 자식들의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그 마음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두 말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이사야 1장을 펼쳐 보면 이 시대에 못난 자식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잠시 한 번 같이 살펴보시겠습니다.

 

(1:2-4)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이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을 붙이고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소망을 부어주십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못났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자식들이었던 것입니다.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한국에서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자식이 있어 신문 방송할 것 없이 일제히 보도가 되었었고 이곳 지역에 있는 라디오 한국에서도 방송이 되었던 기사거리가 있습니다. 아들이 가출하여 부모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것도 모자라 등록금 안 준다고 부모님을 고소했다가 기각 당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의 패륜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그 모든 잘못의 책임을 부모님께 물어 고소까지 하려다가 외면당한 것이기에 사회적인 공분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의 부모는 하도 어의가 없어선지 그냥 웃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이처럼 부모자식들의 천륜인 관계까지 다 망가져 가는 마지막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미국 인권 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녀들이 부모님의 재산을 앞에 높고 치열하게 법정까지 가서 싸우고 다투더니 결국에는 서로 남남처럼 갈라져 더욱 더 법정으로 싸우고 있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사고 있는 것 또한 고귀한 부모님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있는 자식들의 부끄러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님께서 쓰시던 성경책과 노벨 평화상 메달까지 경매에 붙이겠다며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그 성경책은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 때 사용한 것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것임). 이것이 이 시대의 못난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도대체 왜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입니까? 그곳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불쌍하게 여기시는 아버지로서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부끄럽고 챙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코고 넓은 사랑으로 우리 곁에 다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2]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못나고도 부끄러운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친히 따뜻한 사랑으로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대로 수제자라 일컬음 받았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보시는 면전에서 3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한 다음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부활하시자 말자 그와 같은 베드로를 찾아 갈릴리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21:4-6)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배신자는 벌을 주어야 마땅하지 이처럼 축복으로 채워 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벌 대신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주님께서 친히 맡기신 사명을 던져버리고 육신적인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린 베드로에게 또 다시 육신적인 축복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을까요? 이유는 그러나 매우 간단합니다. 사랑하시므로 더 좋은 것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분이 오늘 우리들이 사랑하고 섬기며 예배로 구별하여 드리는 우리들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연약하여 베드로와 같이 실수도 하고 못난 짓도 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불러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D. L. Moody 선생님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을 때 평소 무디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오던 오하이오 주의 시인 W. I. Thompson이 찾아 왔습니다. 그를 쳐다보고 자리에 누웠던 무디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으며 한 말이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톰슨, 나는 자네가 작시, 작곡한 찬송을 참으로 좋아 한다네. 이제 내가 자네가 쓴 찬송 그대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주님께로 가려 한다네. 그리고 그처럼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송시를 쓰고 곡을 붙인 그대가 부럽다네.”하고 말입니다. 무디가 그렇게도 좋아했고 감동을 받았던 톰슨의 그 찬송이 오늘 우리들의 찬송가에 있으니 바로 318장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후렴-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들은 체 하려나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우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집이 있어

죄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영접해 주시겠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하염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책망하려고도 아니고 벌주려고도 아닙니다. 오직 더 좋은 것으로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그렇게 애타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제 두 손을 툭툭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 이처럼 한 아름 사랑을 안고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하겠습니다. 그곳에만 진정한 안식과 평안과 생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3] 함께 있고 싶어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도 못나고 배신하고 우리 자신밖에 모르고 욕심으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우리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우리들과 함께 하기를 우리 하나님처럼 원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 종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떠나 나와 유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 부모님의 마음속에는 이 아들이 가슴에 남아 있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자녀들과 달리 이 종은 미국까지 멀리멀리 와 버렸기 때문에 더욱 더 부모님께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어쩌다 한국 방문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도 하룻밤만 자고나면 떠나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 때마다 아쉬워서 떠나는 아들을 보고 또 보고 끝내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시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은 그렇게도 자식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는 그 마음의 1/100도 읽지 못하고 당연한 듯 그렇게 훌쩍 떠나오곤 했었는데 이제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부모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면 다른 일정 다 줄이고 한 밤이라도 더 부모님과 함께 있다 오는 것이었는데... 왜 세상 이치 다 아는 듯 잘난 척 했던 내가 부모님의 그 작은 속마음 하나 제대로 읽지 못했을까? 싶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오늘 새삼스럽게 하나의 또 다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을 곁에 두고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은 우리 육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늘의 우리 하나님도 엄청 우리들과 함께, 같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 스스로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어리석고 미련하여 우리들의 마음눈이 어두워 보지 못할 뿐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의 눈을 속이고 형이 마땅히 받아야 할 축복을 대신 받고 이를 빼앗긴 형이 분노로 자신을 죽이려 하자 머나먼 외갓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 어린 것이 난생 처음 부모님과 집을 떠나 타향으로 도망가니 그 마음이 얼마나 처량하고 외롭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그와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도망가는 그 첫날밤에 친히 나타나 주시고 함께 해 주셨던 것입니다.

 

(28:15-16)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들과 함께 해 주십니다.

 

(121:7-8)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는 말씀은 더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이렇게 우리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제 다시는 이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방황하는 탕자가 되지 맙시다. 행여 어리석어 먼 곳으로 떠났을지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양손 들고 환영하시며 맞아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약속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구구절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아버지 하나님의 그 신실한 사랑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용기를 내어 돌아오십시다. 우리를 기다리시는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우리들을 맞아주시고 우리들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들의 삶을 보는 것이 또한 신앙생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무엇을 어떻게 행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을 부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부르심은 신앙생활의 기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을 죄악에서 불러내신 것이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근본이요 또한 우리들이 구원 받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실제적으로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지 배웠습니다. 그것은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혀야 할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고무적이고 감동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가슴을 열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열정적으로 화답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우리들은 응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근본적인 모습입니다. 모쪼록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거룩한 날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성전에서 예배로 응답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품에서 새롭고도 신선한 회복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날마다 화답하며 그 하나님과 함께 가는 남은 인생 여정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2014323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부르시는 하나님

 

 

 

 

3. 23, 2014

本文:이사야1:18-20

:

 

 

 

하나님이 없다고 장담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이 땅에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이 있고 임의단체까지 만들어 하나님을 시인하는 기독교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2008년도 영국 브리테니카 2008년도 연감에 보면 전 세계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 2.3%라나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잉거솔이라고 하는 사람은 무신론자로 유명세를 탄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하나님이 없음을 입증해 준다는 잉거솔에게 은근히 기대까지 걸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침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하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며 있는 목청을 다 돋우어 외쳤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내가 당신을 향해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과 욕설로 저주를 퍼부을 테니 나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게 하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하고는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저주와 욕설로 하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해진 그는 모여든 군중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만하면 하나님이 없는 게 확실하지요?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하나님이 그렇게도 능력이 엄청난 분이라면 자신을 공개적으로 이렇게 저주하는 나를 죽이지 못하고 이처럼 가만히 놓아두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는 게 분명합니다.”고 말입니다. 그 때 군중 가운데서 점잖은 신사 한 분이 나오더니 조용히 외쳤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사람처럼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마음의 사랑이 바다보다도 깊고 하늘보다도 높으신 분이십니다. 어찌 점잖은 어른이 아이가 조롱한다고 죽이거나 때리겠습니까? 저렇게 하나님을 저주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저 자를 죽이시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엄청 큰 사랑으로 우리들을 용서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인간이 있다고 외치므로 존재하시거나 한 인간이 없다고 저주한다고 안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한 말씀으로 선언하시고 말았습니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고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고 말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저 많은 만물을 다 지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도 간단하게 그 해답을 내 놓고 있습니다. “그 모든 만물을 지으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들은 반드시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그 만든 이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본질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막연하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반드시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지 계속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르시는 하나님

 

종교인들이 믿는 우상이나 헛된 신들과 우리 하나님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절간의 부처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절마다 집마다 불교신자들은 불상을 만들어 놓고 그 불상 앞에서 복을 달라고 절을 합니다. 몇 번도 하고 몇 천 번도 합니다. 하지만 그 불상은 전혀 움직이거나 보거나 듣거나 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 불상은 Made in China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불상 앞에 엎드려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불상 앞에 엎드린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남아 쪽으로 한 번 가 보신다면 제가 드리는 불쌍하다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가슴이 답답하도록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가난하고 어리석고 미련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먹지 못해 배가 남산같이 불러 있는데도 그 아이보다 말 못하는 불상 앞에 음식을 바치고 지성을 드리고 있는 모습은 불상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생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들의 삶에 직접 관여하시어 구원과 생명과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들의 삶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계시는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그것을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서 믿음을 만들고 분명하고도 확실한 신앙생활로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 한 것이 있어 칭찬 하시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 짓고 형벌 받아야 마땅한 그러한 상황에서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상한 말고 표현하면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들에게 다시없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타락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린 우리 인생들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들을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은 영원히 원수가 되어 다시는 구원의 소망이 없는 그런 비참한 나락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드리기 위해 다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것이 어리석은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의 근본입니다. 이것으로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형벌을 받아서 죽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친히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3:8-9)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최초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나타나 역사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도 하나님의 그 무서운 명령도 거역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숨어버린 이와 같은 악한 인생들을 부리시고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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