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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3일 주일낮설교 (고난이 오는 이유)

고난이 오는 이유

고난주일

4. 13, 2014

本文:베드로전서2:18-25

說敎:崔 仁 根 牧 師

두 달 전인 지난 2월 15일 이슬람 무장단들인 보코하람이 나이지리아 북동부의 기독교인 마을을 습격해 106명이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번에만 있었던 살육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009년 이후 4년 여 동안 2천여 기독교 주민들이 피살되어온 무서운 살인극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크리스챤들을 없애고 민주 정부 대신에 시리아 법에 의한 이슬람 정부를 세우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터내셔널 크리스챤 컨선(ICC)의 아프리카 담당 윌리암 스타크는 "나이지리아 북부에서의 크리스챤 살육을 종식시키려면 나이지리아와 미국 정부의 결단력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의 폭력은 머지않아 대량학살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고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도 평안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이토록 끔찍한 고통과 눈물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참혹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2014년도 고난주일을 맞으면서 우리들을 살리시려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 놓으셨던 우리 주님의 거룩한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들의 삶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고난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원인을 알면 치료도 할 수 있을 것이므로 고통이 오는 이유를 통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는 은혜를 함께 체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끝내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거룩한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가 짧은 인생 여정을 통해 배우고 확신한 고난의 요인들을 성경에 남겨 두었는데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난이 왜 오는지 그 이유를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고난의 요인을 찾아보고 그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축복의 지름길로 삼으시기를 원합니다. 마음 귀를 씻고 말씀을 경청하여 그 말씀으로 새로운 도약과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 복 받은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오는 이유

오늘 본문은 어부였던 베드로가 쓴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고 분명한 핵심을 가진 매우 소중한 말씀입니다. 고난에 관해 이 보다 더 명쾌하게 기록된 성경도 없을 만큼 오늘 본문은 매우 정확하게 고난이 오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 고난의 해결책으로 우리 주님의 고난과 연결하고 있음이 참으로 설득력 있고 감동적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고난의 이유와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와 위로와 신선한 결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와 고난은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오늘 본문 말씀은 고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엉뚱하리 만큼 그 시작이 특이합니다. 사환과 주인관계를 먼저 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벧전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말씀을 이와 같은 사환과 주인관계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와 고난관계가 서로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부터 옵니다. 물론 재난도 있고 질병도 있지만 삶의 뒤를 돌이켜 보면 대부분의 고난은 인간관계에서부터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인간관계를 잘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오늘 베드로 사도가 주신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상대하는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순종하고 복종하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섬겨주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군 다윗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왕을 만나 참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있었습니다. 다윗이 우연한 기회에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군대에서 나라를 지키는 형들에게 갔다가 그 형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와 왕까지도 조롱하고 있는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 악한 장수를 해결해 보려고 나섰다가 왕의 신임을 받게 되고 그 일로 인하여 목동에서 일약 이스라엘 군대의 장수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런데 순진한 백성들이 다윗의 백전백승을 칭송하며 노래하기를,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 했던 것이 화근이 되고 사울 왕이 다윗을 질투하여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토록 무서운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가 훗날 자신이 당한 고통을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에 남아 있는데 참으로 비참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22:12-16)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다윗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드랬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당하는 숱한 고난이 이처럼 흐트러진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들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원활히 하여 고난을 사전에 예방하는 지혜를 터득해야만 하겠습니다.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고난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벧전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성경에 기록된 욥과 같은 경우에는 왜 그가 그토록 혹독한 고난을 당해야 했는지 그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동방의 의인이었고 자녀들까지도 행여나 범죄할까 최선을 다하여 챙기며 아름답게 잘 키웠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또한 입으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10남매가 한 순간에 죽어나갔고 그의 전 재산이 송두리째 사라졌으며 몸까지도 병이 들어 신음하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오늘 본문과 놀랍게 일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벧전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욥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는 말씀을 대조해 보면 참으로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처럼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죄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죄는 고통을 동반하고 찾아옵니다. 우리들은 죄 때문에 생활 속에서 당하는 고난의 근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나 남자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죽도록 고생하며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인간들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받은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창3:16-17)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성경 속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죄는 언제나 고통을 동반하고 있음을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동일한 의미의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고 말입니다. 실제로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어머니를 죽인 한 여인의 살인사건이 어제 12일(토) 울산에서 일어나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조선일보에 게재된 사간의 전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울산 울주경찰서는 12일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존속살인)로 A(여·33)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2일 오전 5시 20분쯤 울산 울주군 온산읍 자신의 원룸에서 어머니 B(55)씨와 말다툼을 하다 화가 나자 목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3년 전부터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해 온 A씨는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한 뒤 "치매 약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B씨가 대답하지 않자 "도저히 못 살겠다. 같이 죽자"며 어머니의 목을 졸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것이 바로 죄로 인해 오는 불행하고도 끔찍한 고통인 것입니다. 술을 먹고 얼떨결에 죄를 지었다고 해도 아직 33살밖에 되지 않은 이 여인은 사는 날 동안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고통으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수군거림을 사는 날 동안 들어야한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이처럼 삶을 고통의 나래로 빠뜨리고 부끄러운 가면을 쉬우는 무서운 형벌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 더 고난이 오는 요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다가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고 고통당하다가 결국은 순교의 제물이 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고통을 당한 인물이었으나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았던 보기 드문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렇다면 그가 당한 "현재의 고난"은 무엇이며 그 요인은 또한 무엇일까요? 그가 당하는 고난의 현주소는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것이며 그 원인은 바로 지금 베드로 사도가 정의해 놓은 바와 같이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은 우리들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죄 중에서 불러내신 이유가 바로 이처럼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님의 고난을 우리들에게 몸소 보여 주신 모범이라고 정의해 두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의 고난을 기리며 따르기 위해 제정된 고난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들이 정녕 배워야 할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좋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렇게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시려고 부르셨다고 하시니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받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토록 고난을 감당하고 배우도록 모범을 보이기 위해 하셨다고 하시니 오늘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요구하시는 선을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식이 병든 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의무감보다도 현실적으로 엄청난 고통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은 힘든 일입니다. 오죽하면 33살 된 딸이 이제 겨우 55살 밖에 안 된 어머니를 목을 졸라 죽였겠습니까? 그만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매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하라고 하시므로 오늘 우리들은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그것이 곧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존경 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는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그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명연설을 하였습니다. "미국 역사를 회고할 때 존경 받는 인물들 중에서 고통스러운 생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고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며 그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습니다. 단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으며 급기야는 목숨까지도 위험에 처해지는 불 유익을 당하였던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과 미국은 자주 독립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대학교수였던 Geralol Forshey박사는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닮아 신앙을 생활화하기 위하여 대학교수직을 사임하고 시카고의 빈민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입주하자 말자 "잘난 척 한다"는 비난과 함께 폭력과 강도와 저주를 퍼붓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난 불 유익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는 끝끝내 그곳을 지켰고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갔습니다. 훗날 그는 수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십자가의 길은 결코 안전과 평안이 보장된 길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었다면 순종 없이는 승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을 위해, 또한 주님을 따르기 위해 고난을 자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일일 뿐입니다. 실제로 비닌거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가슴을 매우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 섬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Abraham Bininger는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던 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는 배 안에 전염병이 돌아 부모님을 배 안에서 잃고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학교를 다니며 예수님을 배우고 막노동을 하면서도 미래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전도사가 되어 성 토마스 섬에 노예들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구원자를 자처하며 그 섬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성 토마스 섬은 덴마크의 식민지였는데 자유인이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청년 비닌거는 "나도 자원 노예가 되어 그들과 함께 살겠으니 그들에게 생명과 소망을 줄 수 있는 복음만은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내고 노예가 되어 그들과 함께 고난의 세월을 보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덴마크 국왕이 감동을 받고 식민지의 법을 개정하여 누구나 다 노예들을 접촉할 수 있도록 하여 비닌거로 하여금 노예 신분이 아닌 전문 사역자로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비닌거는 그 비참한 노예들과 함께 토마스 섬에서 선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다가 거기에서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을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받는 위대한 삶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온 몸으로 친히 모범을 보여 주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벧전2:22-25)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4년도 고난주일입니다. 형식적인 고난이 아니라 진정 복음으로 승화된 고난의 은혜를 터득할 수 있도록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귀한 말씀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들에게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오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고난을 통하여서 우리들이 얻는 진정한 교훈과 축복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고난도 다 같은 고난이 아니라는 사실과 진정 우리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선한 고난을 독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선한 고난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예수님을 친히 고난의 주님으로 십자가에 내 놓으셨다는 사실을 또한 배우게 하셨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고난은 진정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 고난을 피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같이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고 그 고난을 즐길 줄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십자가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인 부활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려야 할 천국의 시민이라면 더 더군다나 고난을 무조건 마다 할 이유는 아닌 듯 싶습니다. 깊은 깨달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서 이제는 고난을 축복으로 여길 줄 아는 진정 성숙한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모쪼록 오늘 귀한 말씀을 받으며 하나님께 나아와 고난주일 예배로 헌신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거룩한 고난의 사람이 되어 부활의 기적을 맛보는 참 보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 멘

2014년 4월 13일

고난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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