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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0일 주일낮설교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부활주일

4. 20, 2014

本文:요한복음11:21-27

說敎:崔 仁 根 牧 師

한겨울 늦은 밤 호랑이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쪽으로 얼른 좇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우는 아이와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소곤거리는 들려왔습니다. "너 울음을 딱 그치지 않으면 여우가 와서 물어간다."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 울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다시 말했습니다. "너 계속해서 그렇게 울면 호랑이가 와서 냉큼 물어 갈거다." 그러자 아이는 더 크게 울어댔습니다. 한 참이 지나자 엄마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기 봐라. 곶감이다. 곶감..." 그러자 아이가 단번에 울음을 딱 그쳤습니다. 그러자 이 소리를 듣고 있던 호랑이의 간이 콩알만 하게 작아졌습니다. 자기는 동물들 중에 가장 강한 자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데 도대체 곶감이라는 놈이 얼마나 세기에 아이가 저렇게도 울음을 딱 그치는가? 도대체 그놈이 어떤 놈이기에 나보다도 더 세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쏜살같이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들어왔던 우화입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자기보다 더 강한 자는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힘을 가진 자는 힘이 없는 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에게 가하는 가장 무서운 액션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입니다. 조폭들은 누구나 다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잔인하게 사람의 목숨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 이것이 그들이 쓰는 용어이고 실제로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쉽게 죽이곤 합니다. 그러므로 조폭 두목 앞에서는 무조건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쏟아 놓았습니다.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허망된 모습입니다. 자기는 남도 아닌 동생을 쳐 죽여 놓고 자신은 남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이런 모습이 바로 이기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타락한 인간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문무를 다 익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스스로 자처하고 나섰던 모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출2:14-15)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대장부 중의 대장부인 모세라도 힘이 있는 자 왕이 죽이려고 하자 줄행랑을 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16일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300여명과 일반 승객 150여명과 승무원등 476명을 태우고 인천을 떠나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 바다에서 침몰해 지금 현재 29명이 숨지고 273명이 실종된 끔찍한 사건이 발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온통 대한민국이 벌집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들인 꽃같이 아름다운 아들과 딸을 바다에 침몰된 배속에 가두어 둔 채 생사조차 모르고 울부짖는 부모님들의 모습은 차마 바로 쳐다 볼 수 조차 없을 만큼 처참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가져다 준 비참한 슬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이 보다 더 고통스러운 비극은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당하는 최악의 슬픔과 고통은 이와 같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거하는 그 누구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육신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은 바로 이러한 절박한 현상 앞에서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죽음이 끝인 줄 알고 한없이 슬퍼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슬픔은 같지만 슬픔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방법론에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부활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세월호 침몰에서 간신히 구조가 되었던 단원고 교감 강모씨(53)는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며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신앙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인생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이와 같은 급변상태를 어떻게 대처하는가와 직결되는 생명 그 자체인 것임을 알 수 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부활신앙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지금 오라비가 죽어 난리가 난 마르다의 집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라비가 죽자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요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이것이 보편적인 죽음 앞에 선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한결같이 요구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들이 가져야 할 분명한 자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만 있으면 반드시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요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결코 하나의 절기로, 행사로 끝내서는 안 될 가장 믿음을 필요로 하는 계절입니다. 이 계절에 믿음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영적인 변화와 기적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마지막 시대에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없어져갑니다. 교회에만 다닐 뿐 주님께서 요구하시고 인정하시는 그 믿음이 없습니다.

(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부활절에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믿음을 확인하고 믿음을 재생산하는 성도들로 거듭나야 합니다. 부활은 그와 같은 믿음을 가졌을 때만 가능한 부수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과연 무엇입니까?

(요11: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믿음의 내용들입니다. 2014년도 부활주일에는 이와 같이 분명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지난 월요일 목사님들과 모인 자리에서 때가 때인 만큼 "생명"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특별히 산이나 들로 여행을 하다보면 생명의 그 신비로움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먼지나 모래가 바람에 날리다가 바위의 움푹 패인 곳에 쌓이게 되는데 그 작은 먼지 모래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거기에서 예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 작은 흙에 바람에 날리던 식물의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난 것입니다. 너무나도 신비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시는 섭리요 이치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을 친히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생명 그 자체가 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을 소개해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바로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부활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부활을 믿고 또한 우리들에게 전수해 주고 있는 사도 바울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선포하고 주님만이 친히 부활하시어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어 주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15:12-15)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고 말입니다.

[2] 죽지 않고 다시 사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지 않는다거나 죽어도 산다는 이와 같은 말씀들을 이해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사에서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엉뚱한 소리같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그들에게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그 누이 마르다에게서 친히 이것을 확신 시키셨던 것입니다. 믿지 못하거나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결코 이적이나 기적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13: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또한 부활의 복된 기적을 결코 체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어서 다 흙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다는 말일까요?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고전15:35-44)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 말입니다. 참으로 심오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알아듣기 쉽도록 우리들의 일상을 통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씨 뿌리고 열매 맺는 비유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신령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경험과 지식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어쩌면 영원히 그 해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우리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흙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다시 회복 못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죽어서 이미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건강한 원상태로 부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요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까지 역사해 주시고 친히 목도할 수 있도록 보여주셨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 보여 주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사실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진정한 기적을 볼 수 있도록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절감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복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진실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막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3]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라비를 잃고 슬픔과 고통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마르다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주님 앞에서 당당하게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마르다는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 하나로 결국 죽은 오라비를 다시 만나는 부활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사모하고 기대 할 만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와 같은 놀라운 믿음을 먼저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믿는 소중하신 우리 주님이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의 고백 속에 주님께서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수 있다는 진정한 믿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씀의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 권세도 깨뜨리시고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 고백 속에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주님을 향해 바로 이처럼 완벽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적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말씀을 듣고 또한 기적을 보았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왜 그렇게도 많은 기적과 말씀을 받았는데도 그들은 왜 결국 예수님을 다 떠나가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마르다와 같은 진실된 고백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입술로만 예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만 목사님과 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향해서도 주님의 사역자들인 목사님을 향해서도 무엇보다 먼저 신실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육신은 육신으로 끝나고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신령한 기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영적인 문제요 신령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관계와 사랑과 기대만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활절을 맞고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바른 신앙고백을 하라"고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4년도 부활주일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무덤에 머물러 있도록 그냥 둘 수가 없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그런 영광스런 역사를 기념하는 복된 날입니다. 지나온 2천년 동안 수많은 방해꾼들과 훼방꾼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공격을 받고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더 많은 성도들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이제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불신자들에게도 인식이 될 만큼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이 이처럼 놀라운 사건을 생활 속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교사로 나갔다가 아내를 잃고 형제를 잃고 때로는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신앙으로 슬픔을 극복하고 더욱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가족을 살해한 그 악한 죄인들의 가슴을 녹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그런 분들의 놀라운 사랑의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부활신앙, 그것입니다. 이것이 생활 속에 젖어든 놀라운 부활신앙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도 매일 매일의 삶이 부활절이 되어 풍성한 축복으로 넉넉히 용서하고 사랑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그런 승리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 귀한 원동력은 오직 부활신앙 뿐입니다. 모쪼록 부활절 예배를 통해 말씀을 받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도 이처럼 놀라운 부활의 소망으로 새롭게 거듭나서 믿음으로 소망을 꿈꾸는 진정한 행복자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4월 20일

부활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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