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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8일 주일낮설교 ( 따를 스승이 있는가?)

따를 스승이 있는가?

스승의주일

5. 18, 2014

本文:마태복음16:21-28

說敎:崔 仁 根 牧 師

우리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우리들에게 나타내실 때 자신을 우리들의 주님과 선생님이라고 표현해 주셨습니다.

(요13: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최고의 지도자는 바로 선생님인 '랍비'였고 그 보다 더 귀한 직은 '큐리오스'라고 부르는 주님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당시 그렇게도 귀하신 분으로 칭송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했던 주님께서 그와 같은 선생님이요 주님이신 자신을 따르려고 한다면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야만 하는지? 그 방안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혼란스럽고 힘든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마음 놓고 따를 수 있는 스승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주님을 따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선생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선생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야 하는데 오늘 우리들에게는 전혀 그와 같은 자세가 준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따라가려면 스승께서 하셨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자들의 발이라도 씻어 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2014년도 스승의 주일을 맞아서 이처럼 스승을 제대로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배워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스승 되신 예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제자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도 스승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를 스승이 있는가?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행은 제대로 따를 스승이 없다는 것과 한 평생을 배우고 닦은 학문과 경험을 제대로 전수해 줄 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2014년 5월 13일 대한민국 교사 43명이 청와대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박태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 스스로 하야 하라. 그렇지 않으면 퇴진 운동을 벌이겠다."고 하여 교육부가 전원 징계를 하겠다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교사도 엄밀히 대한민국 공무원인데 공무원이 백성들이 투표하여 선택하고 법이 지정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한 대통령의 자격을 운운하고 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하면 이는 엄연히 실정법 위반이자 비도덕적인 악한 행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기에 합세하여 전교조 등 교사 1만 5천여 명이 대통령 퇴진 운동을 벌이겠다고 들고 일어나고 있으니 안타깝다 못해 한심하기 까지 합니다. 학생들을 올바로 인도하고 가르쳐야 할 선생님들이 이 정도이니 나라의 미래가 걱정스럽고 그와 같은 선생님 밑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의 장래가 염려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온 몸으로 겪고 있는 교육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때에 이 종은 하나님 앞에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따를 서승이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자처하셔서, "내가 너희들의 선생이요 주님이다."고 선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믿고 따를 진정한 스승은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도 귀하신 분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이제는 제대로 한 번 섬기고 따라서 짧은 인생 후회 없이 살고 뭔가를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하겠습니다. 복된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 진정한 스승으로 우리 예수님을 모셨으니 올바른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큰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는 스승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왜 제자들을 선택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혹시 그것을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막3:14-15)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특별히 열 둘을 택하실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으뜸 되는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을 제자로 택하시고 스스로 우리들의 스승이 되신 것은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머물도록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있지 아니하고 늘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니 친히 찾아 오셔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신지요?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도록 바깥에 주님을 홀로 두고 우리들만의 세계에서 분주하고 피곤하여 주님께서 문 밖에 서 계시는 것조차 모르고 있지나 않는지요? 우리들의 이와 같은 현실을 두 눈으로 보고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찬송가 325장은 우리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거기에다 올려놓고 있습니다.

1.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밖에 세워 두니 참 나의 수치라

2. 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렀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 두니 한없는 내 죄라

3.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소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려고 우리들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불러 선택하시고 제자로 삼아 주셨는데 우리들은 그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두고 우리들의 육신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가사는 원래 William Walsham How 주교가 하나의 성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쓴 것입니다. 그 성화란, The Light of the World(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이라는 것인데 Holman Hunt의 명작으로 예수님께서 흰 옷을 입으시고 온갖 잡풀로 우거진 어느 대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그런 모습이 그려진 그림입니다. 윌리엄 주교가 44세가 되던 어느 날 그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큰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이 찬송가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들여다 본 그림은 이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두드리시는 문에는 큰 빗장이 질러져 있었고, 왼쪽 장석에는 붉은 녹이 쓸어 있었으며 문설주에는 담쟁이 넝쿨이 기어 올라가 서로 얽혀 있었고, 그 주위에는 박쥐가 날아다니고 있었으며, 문지방에는 가시넝쿨이 우거져 있었고, 이삭 하나 없는 옥수수와 각 종 풀이 무성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는 그런 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던 윌리엄의 가슴에 너무나도 죄스러운 눈물이 맺혔고 그는 뜨거운 가슴으로 325장의 가사를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기를 간절히 원할 뿐, 실제로 우리들의 나날들을 뒤돌아보면 이렇게 영원히 열리지 않은 것 같은 문으로 우리 마음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원하시어 우리들을 제자로 삼고 친히 선생이라고 자신을 가르쳐 주신 주님 앞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께서 무서운 고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을 때 그 주님 곁을 지켜 주는 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수제자라 칭함을 받았던 베드로마저도 그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한 채 떠나버렸으니까 말입니다. 사람이든 주님이시든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해 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뉴욕에 가면 웨스트민스터 수양관이 있습니다. 그것을 건립할 때 있었던 미담이 지금까지도 아름답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뉴너메이커 할머니께서 당시 전 재산 70만 불을 내 놓아 지어지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는 평생을 혼자 살면서 화장품을 팔아 모은 재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예수님께서 내가 혼자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고 사랑해 주셨으니 나도 그 예수님을 닮아 누구든지 주님 만나기 위해 이 수양관에 오시는 분들을 섬길 수 있게 기쁨으로 내 전 재산을 내 놓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을 진정한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이라면 이처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 빗장을 풀고 사랑을 베풀며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제자는 스승 앞에서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 누가 되었던 지간에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겠다고 한다면 하나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이는 곧 주님 앞에서는 최소한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을 살리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분이십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시면서 죄인들의 손에 붙잡혀 가진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에 처형되신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 친히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이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제자로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네 자신을 좀 죽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스승 되신 주님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주님 앞에서 "힘든다. 속상한다. 기분 나쁘다. 자존심 상한다. 손해 보았다. 무시당했다..." 하면서 야단법석을 떤다면 우리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입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래서 그는 평생에 인간적으로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났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제자로, 사도로 불러 주신 주님의 그 길을 묵묵히 감당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최후의 승리입니까?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통쾌하고도 멋들어진 삶을 살려면 주님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사도 바울이 단언하고 선포하였던 것처럼 우리들의 자아가 죽어야만 가능합니다.

하와이 다운타운에 가면 실물크기와 똑 같은 한 사람의 동상이 자동차가 달리는 길옆에 세워져 있습니다. 자세히 곁에 가보면 "문둥병자와 함께 살다가 그들과 함께 죽은 다미안 신부"라는 푯말이 있습니다. 그 옛날 미국 본토에서 발생하는 문둥병자를 한국의 소록도와 같이 하와이 섬에다 유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와이 본섬이 정상적인 사람들로 자꾸만 인구가 불어나니 거기에서 또 다시 무인도로 나병환자를 옮겼습니다. 그 때 그 불쌍한 나병환자들과 함께 섬으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다미안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들어 간 다미안 신부를 나병환자들이 배척하였습니다. "잘난 척 하지 말라, 우리들이 불쌍하게 보이느냐? 위대한 척 우리들을 그렇게 가엾게 보지 말고 육지로 나가라..." 그 때 다미안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그 순수한 사랑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저 환자들이 저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으니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저도 문둥병이 들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 기도가 응답 되었던지 그 후 다미안 신부도 문동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나병환자들이 다미안 신부님의 진심어린 사랑을 인정하고 함께 협력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하와이 사람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나병환자들과 일생을 함께 한 그의 따뜻한 사랑을 기리며 거기에 동상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님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모든 것이 다 죽어야만 끝까지 갈 수 있는 외롭고도 고독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네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라."고 말입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가시 밭 길입니다. 눈물 없이 갈 수 없고 희생 없이 갈 수 없는 모질고도 힘든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까지 힘든 길인 줄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애 못 박히시자 단 사흘도 기다리지 못한 채 다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21:2-3)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든다고 포기해버리고 어렵다고 짜증내며 주님의 거룩한 그 길을 스스로 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이 종과 함께 총신 신대원 75회를 졸업한 친구 가운데 우리 시애틀의 이웃 위성도시에서 목회하다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 목회를 그만 둔 친구가 있고 야끼마에서 숱한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그곳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그 모진 고난을 이기지 못해 포기하고 공부하러 LA로 떠난다더니 더 이상 소식마저 끊어진 친구도 있습니다. 지금도 인천에 가면 택시 기사의 1/3이 목사나 전도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님을 똑바로 따라가기가 그렇게도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습을 미리 내다 보시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가을이면 겨울 독감 예방주사를 맞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 겨울에 유행할 것 같은 독감 바이러스를 미리 몸속에 주입하여 항체를 키우므로 진짜 독감 바이러스가 들어 왔을 때 이겨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렇습니다. 미리 십자가를 질 각오와 훈련과 내성을 키워 놓으면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당당하게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이민 1세대들이 자라날 때에는 자살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가난과 질병과 고생을 삶의 일부분인 줄 알고 온 몸으로 겪어 왔기 때문에 어렵다고 삶을 포기하는 여린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날 젊은 청소년들을 보면 조그마한 어려움만 닥쳐도 이겨내지 못한 채 자살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어려움 하나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겠으며 이웃을 위해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는 세월호 사건만 보아도 이를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남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만 이웃을 생각하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였더라면 결코 저런 끔찍한 희생은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명조끼를 입히고 모두 갑판 위로 불러내 놓기만 하였어도 모두 구조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승객들이야 살든지 죽든지 내버려두고 자기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혈안이 되었기에 저토록 끔찍한 사건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이것만 생각하면 그 얼마나 원통하고 안타깝겠는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인 것입니다.

그 옛날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며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건만 칼과 몽치를 든 악당들이 들이닥치자 주님도 사명도 다 버리고 도망가고 있는데 홀연히 광체가 비취며 주님께서 급히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고 계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네가 버린 십자가를 다시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에게 명하신 그 말씀 그대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지간에 우리는 묵묵히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님이 되었던, 형제들이 되었던, 원수가 되었던 지간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인 줄 알고 묵묵히 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버리고 베드로처럼 떠나면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그 십자가를 다시 지러 가시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71명으로 구성되고 사법, 종교, 정치의 3권을 장악한 이 공회의 권한은 실로 대단했고 거기의 의원이 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던 요셉이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공공연히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보통의 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산헤드린의 의장이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처형까지 시킨 가야바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자신의 종말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라고 판단하였기에 그는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워 두신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마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이미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이처럼 아리마대 요셉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 예수님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슴이 서늘합니다. 당시 사형된 죄수의 시신은 인수하는 친인척이 없으면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져 짐승의 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높은 공회의 의원이었던 요셉이 자신의 평생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다 잃을 각오와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어 놓은 채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자신의 소중한 묘지에 장사까지 지냈으므로 우리 예수님께서 또 다시 부활하시는 영광을 누리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다 제자 된 요셉이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희생을 각오한 제자의 도리를 다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라"시는 우리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복된 자리에서 뒷걸음질 치지 않도록 믿음의 옷깃을 여미고 요셉처럼 당당하게 빌라도 앞에라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신앙의 본질인 부활의 영광을 맛보고 역사에 남는 요셉과 같은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4년도 스승의주일입니다. 우리들에게 일만 스승이 있다 하나 예수님 만 하겠습니까? 귀한 스승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제자는 역시 복된 자일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삶이 역사에 길이 빛날 수 있도록 끝까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따르고 배우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떠한 경우에도 스승을 떠나는 일이 없이 늘 스승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순종하는 풍성한 열매를 또한 맺혀야 하겠습니다. 그 길이 바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하고자 하면 능력 주시는 분 우리 주님이시니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은 용기와 희생을 각오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따라 갈 스승으로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또한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따라 올만한 스승으로 남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굳게 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용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말씀으로 무장하고 믿음으로 예배를 올려드리는 참 아름다운 성도님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과 강건함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스승 되신 우리 예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5월 18일

스승의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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