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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5일 주일낮설교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5. 25, 2014

本文:요한복음11:17-23

說敎:崔 仁 根 牧 師

우리는 과연 우리 예수님을 우리 삶에 어느 정도 소중한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워서 낙심하며 주님을 떠나고 잘 되면 교만하여 주님을 잊어버리는 안타까움 속에서 겉사람만 교회에 다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가정의 달을 마지막 보내면서 우리 가정과 삶에 가장 소중하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더 찾아보고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McDonald 의 창업자 Ray 크록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오직 예수님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우리 사업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렇게 살겠습니다."고 다짐하며 도와달라고 해 놓고 사업이 조금씩 일어나고 바빠지니까 예수님은 간곳없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는 끔찍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에 데인 듯 깜짝 놀라 스스로를 책망하며 연약한 자신을 믿지 못해 신문에다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어리석고 초라한 모습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꼭 창업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예수님만을 우리 사업장의 사장님으로 삼고 오직 예수님 우선주의로 사업을 해 나가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McDonald는 전 세계에서 제1의 햄버거 샆으로 그 명성을 당당히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승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안 계셔서 안타까와 눈물짓는 한 여인의 순전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처럼 믿고 의지했던 오라비가 병들게 되자 그는 득달같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리고 속히 와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끝내 오라비는 죽고 말았습니다. 더운 지방이라 일찌감치 장례를 치르고 이미 나흘이나 지나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날 때, 그 때서야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 마르다가 첫성으로 한 말이 바로 원망 섞인 이 말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이 한 말 속에 참으로 많은 것이 들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진정으로 새롭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고귀한 말씀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마음 귀를 기울이고 들어서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으로 우리들의 남은 삶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런 멋전 성도들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요한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을 아주 심도 있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무려 44절이나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요 요한은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성경이 엄청나게 많이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 사도입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렇게까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고 고귀한 것들만으로 요약이 되어 있다고 선언한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이었는데도 그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이렇게도 길고도 자세하게 기록하여 놓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과 의미가 깊다는 뜻일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아야 될는지?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유익을 주십니다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때 예수님과 마르다와 마리아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오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그 가정을 많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실이 구전으로 전해진 것도 아니고 성경에 명명백백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요11:2-5)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장정 1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렸던 여인이요 예수님 또한 그와 같은 그들의 가정을 본래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다급히 사람을 보내왔는데도 지체하시며 시간을 보내시고 오시지 않다가 결국 그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야 오셨으니 오해가 쌓일 만도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도 나가보지도 않았고 마르다만 겨우 나가 예수님을 맞기는 했으나 원망에 가득한 마음이었습니다.

(요11:20-21)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생각과 오늘 우리들의 생각에는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작은 생각이 주님을 오해하게 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객관적으로 오늘 본문인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들은 오로지 죽은 오라비 나사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우리 주님은 오히려 이와 같은 슬픈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과 뜻을 이 땅에 나타내시려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나사로가 죽어 섞은 냄새가 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깊은 우리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섭섭함과 아쉬움과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육신의 한계를 지닌 마르다와 마리아는 우리 주님의 신령한 계획과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이런 내용들이 한결같이 사도 요한이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오해 없도록 설명해 주는 소중한 자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우리 주님을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좁은 안목으로 주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말도록 권했다가 사탄이라는 무서운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칼을 빼들고 말고의 귀를 자르는 우를 범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마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26:51-52)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 연약한 인생들은 우리 주님의 속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도하고 실망도하며 그렇게 주님 앞에서 불충을 저지를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은 무엇을 하시든지 결국은 우리들에게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을 말씀 그대로 믿고 기대하고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우리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을 끝까지 기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마르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11:21-22)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미 사랑하는 오라비가 죽어서 장사까지 다 끝냈는데도 아직도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의 기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다는 말이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주님에 대한 기대는 우리 속사람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 할 것이라고 성군 다윗은 거듭 천명해 놓았던 것입니다.

(시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37:22)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가장 핵심적인 믿음도 또한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포기란 절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당찬 각오를 선포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삼상12:23-24)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이 당찬 믿음을 견지하지 못한 채 조금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조금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그런 어리석은 우를 많이 범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대 앞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릇된 신앙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끈질긴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부른 수제자였습니다. 마침내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 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엘리사는 그 스승 엘리야를 순간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돌아가라 강권하시는데도 끝까지 따라 갔던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따를 것임을 알아 챈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받으신 영감보다 갑절이나 더 받기를 원합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제자에게 그것을 약속하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엘리사는 스승에게도 그 기대를 잊지 아니하고 끝까지 따랐는데 오늘 우리들은 어찌하여 주님께 대한 기대를 그리 쉽게 저버리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오라비가 죽어 장사까지 마쳤지만 주님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 곁에서 소망과 기대를 품었다가 끝내는 죽은 오라비를 부활케 하였던 마르다의 기대를 오늘 우리들도 가슴으로 깨닫고 새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기대를 결단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웃과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비록 부모 없이 그렇게 고아처럼 살았지만 사람의 근본 됨됨이가 잘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 그 이웃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하였는가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슬픔 속에서 눈물 흘리고 있을 때 그 이웃들은 한결같이 그들과 함께 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이와 같은 말씀들은 한결같이 슬픔을 당한 마르다와 마리아를 그 이웃들이 정성을 다해 섬기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는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그들이 이웃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아름답게 잘 지내왔는가를 단적으로 증거해 주는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이 평소에 늘 강조해 왔던 것처럼 우리는 나날의 생확 속에서 인생을 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사람을 귀하에 여기고 주변에 사랑하고 함께 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두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을 당했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재물보다 훤씬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재물로 사람은 살 수 있지만 그 마음은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얻은 사람은 재물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얻은 인생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쏟아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 사람을 배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말세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단호히 말씀 드립니다. "백 명의 친구를 두는 것 보다 한 명의 원수를 두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은 많은 친구가 아니라 단 하나의 원수가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아주 극단적이고도 난해하지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강권하셨던 것입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마르다와 같은 슬픈 일이 생겼을 때 과연 몇 사람이나 찾아와 위로하며 아픈 우리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고통의 때에 원근 각지에서 찾아 와 위로해 주었던 욥의 친구와 같이, 위기의 때에 도움과 위로를 주었던 다윗과 요나단 같이 함께 할 인생의 친구가 필요한 때입니다. 평소에 그리고 밥술이라도 먹을 것이 있을 때에 시간과 재물을 투자하여 인생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인 친구를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시 하나를 소개하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함께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함석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가라앉을 때

구명 배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칭송보다도

"아니오"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생을 헛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괜찮은 사람 하나 없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 정도의 멋들어진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면 한 번 멋들어지게 살아갈 만한 세상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위기의 때에 함께 할 좋은 사람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다 보내면서 오늘은 우리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넓은 믿음으로 우리 주님을 이해하며 끝까지 그 주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의 어리석고 미련한 판단으로 주님까지도 오해하는 그런 못난 삶을 이제는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무조건 믿고 기다리며 모든 것을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기대하는 그런 멋들어진 마음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비록 세상에서 귀하고 좋은 것은 가지고 누리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예수님을 친구로 삼고 주변의 모든 이웃들을 가족과 같이 살아가는 그런, 진정 모든 것을 다 가진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원수를 맺고 미워하며 살아갈 만큼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그런 멋진 친구하나 없이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을 다 모아놓고 독수리도 못 올라갈 그런 높은 벼슬을 누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냄새가 나야 하고 인생은 유한하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오늘이라는 날에 기뻐하고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로 헌신하는 천상의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늘의 하나님은 가슴에 모시고 세상의 사람은 없는 그런 엉터리 신앙을 넘어서서 땅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줄 아는 소박한 소시민이 되어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와 주시는 진정한 신자들로 거듭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5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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