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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일 주일낮설교 (늦게 오신 예수님)

늦게 오신 예수님

6. 1, 2014

本文:요한복음11:1-16

說敎:崔 仁 根 牧 師

지스문트 겟츠가 그린 [버림받은 예수]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또한 서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하고 있는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남녀들,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거기 서 계시는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열이 토론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 또한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간호사의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서서 곁눈으로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스문트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께 무관심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지만 오늘 교인들은 그 누구도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님께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하루 24시간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몇 번이나 생각하며 생활하고 있습니까? 부끄럽지만 오늘 우리들도 지스문트의 그림 속의 사람들처럼 우리들의 일상에 바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묵묵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셨는지? 가셨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오늘 조금 더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을 훈련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지? 공부하려고 합니다. 부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움직이시는 모습과 말씀하시는 내용들을 잘 배우고 익혀서 예수님의 관심 안에 있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멀어지면 결국 소중한 생명과도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의 인생 중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늦게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친히 사랑하시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부모같이 소중하게 지켜주었던 오라비가 병들자 지체하지 않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오시라고 요청합니다.

(요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즉시 그들에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틀이나 더 지체하시다가 나사로가 결국 죽고 난 다음에야 가셨습니다.

(요11:6-7)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라는 내용과 같이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친히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즉시 가시지 않고 이렇게 늦게 가셨을까요? 오늘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은혜 받는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는 훈련을 하시려고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및 오늘 우리들에게 기다림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미 배웠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지식과 경험으로 예수님도 판단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며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연락을 하면 즉시 달려오실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이틀이나 더 지체하시다가 결국 오라비가 죽자 늦게 오신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예수님이 오신다는 기별을 받고서도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던 마리아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요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마르다도 나가 마중하기는 하였지만 그 마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원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요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는 말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 중에 그 누구라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좁은 가슴으로 하늘같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였던 것은 전혀 이상 할 것이 없는 오늘 우리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기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늦게 오신 자신을 기다리지 못해 만들어 낸 어리석은 오해를 불식시키고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성도로 훈련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기다질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조급한 사람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잠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이 말씀들은 한결같이 진득하게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화내고 말하는 자들을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라 책망하시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기다리며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으려는 깊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급한 우리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유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는 성령님도 기다려야 받을 수 있고 어리석고 불쌍한 우리들이 예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을 기다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그와 같은 기다리게 하심에 합격하여 끝끝내 이삭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히6: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롬4:18-22)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다림과 믿음이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결국 길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그렇게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시고 풍성한 축복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오히려 더 늦게 오시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오히려 기다리시다가 이틀이나 더 늦게 오신 것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므로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요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늦게 가시면 나사로가 죽을 줄 몰라서 늦게 가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이틀이나 더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오해 없이 받아들이고 끝까지 기대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일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고 오늘 본문에 분명히 기록된 바와 같이 어리석은 인생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요11:12-13)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근에서 모시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그렇게도 간절한 바램을 물리치고 이틀이나 더 유하시다가 그들에게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를 굳이 더 설명 드리자면 완벽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신 다음 완벽하게 다시 살려내심을 또한 만 천하에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진실로 누구신지 온 백성들과 제자들이 비로소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놀라운 기적을, 이 땅에서 아직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그 엄청난 기적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참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곧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살후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나사로가 살았을 때 오셔서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늦게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고 우리들을 돌보아주시지 않는 것 같고 무관심하시는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참고 기다리며 주님을 기대하고 있으면 반드시 처음보다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유명한 한 말씀을 우리들에게 남겨 놓으셨던 것입니다.

(요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고 말입니다.

제자들을 담대하게 훈련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부르심을 받고도 가시지 않자 제자들은 다소 안도하였습니다. 사실 그쪽에서 얼마 전에도 예수님을 잡으려는 악당들이 돌로 치려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침내 때가 되셨다고 판단하시고 그리로 가자고 하시자 그들은 깜짝 놀라 막아섰습니다.

(요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물로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더 무섭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유약한 그들을 강하게 훈련하실 필요를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늦게 가시면서 제자들을 보다 더 강력하게 훈련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11: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빛과 같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그 모든 위험과 필요를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제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가 사람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빛의 자려들이라 정의하시고 그와 같이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엡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지만 우리들의 본질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요, 또한 그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착하고 의롭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에게는 결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로 치려는 자들을 두려워하며 또 다시 그곳으로 가기를 꺼려하였던 제자들을 주님께서 담대하게 설명하시고 훈련하시니 결국 그들은 담대하게 변화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도마가 당당하게 일어나 외쳤습니다.

(요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이 당당하게 일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빛의 자녀들처럼 담대하고 강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이기고 이 세상도 이기고 사탄 마귀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이기는 자들에게만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이틀이나 더 늦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인해 그렇게도 소중하던 오라비는 끝내 죽고 말았고 썩고 냄새가 나 장례식까지 마쳐버렸습니다. 불행하게도 주님은 바로 그 때서야 오셨습니다. 늦게 오신 예수님은 그러나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기다리는 훈련과 주님의 기적 같은 능력을 보는 축복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오히려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칠 만큼 강력한 제자들로 변화를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그 때는 비록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늦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기대보다 더 놀라운 역사를 이렇게도 분명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우리들에게 축복이 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그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 엄청난 능력으로 기적같이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담대하게 그리고 끝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견지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돌아가고 우리들의 삶에는 풍성한 축복이 임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선한 6월 첫 주일에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와 감사와 찬양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능력이 公私(공사)간에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6월 1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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