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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4년 7월 13일 주일낮설교 (기뻐하라!)

2014년 7월 13일 주일낮설교 (기뻐하라!)

기뻐하라!

7. 13, 2014

本文:빌립보서4:1-9

說敎:崔 仁 根 牧 師

사람들에게 "[기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의외로그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쁨이란 사실 기쁨을 느낄 때,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조금 수고를 기울여 국어 사전을 찾아본 사람은 "기쁨이란, 흐뭇하고 만족스러운 일로 인해 마음에 일어나는 즐거운 감정"이라고 대답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어느 것도 기쁨을 잘못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이 [기쁨]이라는 말 안에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저는 [진정한 기쁨을,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마음 깊숙히 느끼게 되는 만족이나 흐뭇함]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 생활을 인도하시면,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섬겼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이런 열심과 순수함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처음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기쁨]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계속해 오면서, 처음 주님을 만난 그 때의 모습 그대로, 이기적인 계산 없이,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을 잃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기뻐할 줄 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기쁨은 [인간의 영혼에 뿌리내린 성령의 열매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인생 선배들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사물의 밝은 면을 바라보라", 또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만일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 힘으로는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길 원하십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현실에서 아무 문제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동행의 삶을 경험하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먼저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날로 성장하기를 기도 드리십시오. 오늘도 우리의 성품이 더욱 주님을 닮아가며,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날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도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오늘의 짧은 본문에서 "기뻐하라"고 두 번씩이나 거듭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빌립보서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빌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 깊은 곳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자유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처럼 "기쁨"에 대해 명령하고 강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적인 높은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사로운 편지가 성경이 되었고 오늘 우리들에게 다가 오는 생명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오늘은 진짜 신자라면 일단 삶 속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보다 더 성숙된 차원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기다려 보고자 합니다. 마음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받아서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차원이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이 충만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 있어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들인 유대민족을 향하여 기도 할 때는 늘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롬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빌립보교회를 위해 기도 할 때는 이와 같은 근심과 고통이 아니라 큰 기쁨으로 가도하였습니다.

(빌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어째서 이렇게도 서로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될지라도 자기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백성들이 되어야 할 대상이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성숙해 있는 높은 단계에 오른 자랑스러운 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빌1:4-5)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빌립보교인들은 진정한 신앙으로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었던 자랑스러운 신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말과 글로는 단순하게 표현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엄청난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하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하고 꼭 "주 안에서"라는 단서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빌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는 말씀들이 한결 같은 그 생생한 증거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기뻐 할 수 있는 숨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주님 안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이신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주 안에" 머물고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성인 1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32%는 직계 가족이 "거듭난 기독인(Born-again Christian)"과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불행할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오직 9%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상관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반면에 직계 가족이 무신론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응답은 단지 4%에 불과하였고 반대로 불행할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무려 49%에 달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한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와 주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채 5년도 되기 전에 이혼과 불행과 고통의 늪으로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짧은 인생을 진정으로 웃으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무조건 말씀에 순종하여 "주 안에" 머무는 참된 신앙생활을 지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용서가 기쁨을 만들어 줍니다

"기뻐하라"고 거듭 명령한 사도 바울은 뜬금없이 관용과 용서에 관해 짧으면서도 강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단어 "관용"은 요즘 그리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 무슨 뜻인지? 원어를 찾아보았더니 ἐπιεκἐs(에피에케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이성적인'이라는 뜻의 εἰκὀs(에이코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이성적인 것'(Reasonableness)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쁨의 원인이기도 하고 또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이웃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관용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관용을 쉽게 풀이해 본다면, "자신에 대해 악하게 구는 사람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무 처리를 함에 있어 공정하게 일하는 것, 또는 남의 성격과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고 공평하게 판단하는 것, 성격이 진실하고 감정을 잘 조절하고 절제하는 것"이란 등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설명은,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맨하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대인이 상점을 인수하여 장사를 하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어린 아이들이 몰려 와서 "유대인 놈, 유대인 놈"하고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불러 한 사람에게 각각 25센트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도 또 와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또 각 아이마다 15센트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10센트씩, 그리고 그 다음에는 5센트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몰려와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두 손을 펴 보이며 "이제는 너희들에게 줄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했더니 그 아이들이 다시는 그 집에 몰려와서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관대하게 적극적으로 용서한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처럼 관대하게 용서해 주라고 명령하면서 끝 부분에 의미심장한 말을 하나 덧 붙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이었습니다.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바와 같이 남을 미워 할 때는 결코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반대로 큰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해 주었을 때는 놀랍게도 기쁨이 가득하게 밀려옴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였던 배신자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엡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러했던 우리들을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엡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우리들을 오직 은혜로 구원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들도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베드로가 어느 날 주님께 칭찬이라도 들을 것이라 기대하며 참으로 큰 마음으로 결단하고 주님께 그 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형제가 만일 잘못하게 되면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겠습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뜻밖이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마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것은 성도들이라면 사는 날 동안 가슴에 새겨 두고 곱씹어 보아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는 참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월남에서 부상당하여 돌아온 군인들을 위한 대대적인 위문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인 감독은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인 밥 호프(Bob Hope)를 이 공연에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밥 호프는 너무나 바쁜데다가 선약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밥 호프가 없는 위문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위로해 주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라며 여러 번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밥 호프도 끈질긴 감독의 부탁에 "그러면 제가 한 5분 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주최측에서는 그렇게만 해줘도 고맙겠다고 해서 밥 호프는 그 위로공연에 출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공연 당일, 5분을 약속하고 올라간 밥 호프가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밥 호프는 5분이 지나도 끝낼 생각을 안 하고 10분, 15분, 25분이 넘었는데도 공연을 계속했습니다. 밥 호프는 거의 40분 동안 공연을 하고 내려왔는데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독은 5분을 공연하기로 하고 40분을 하게 된 경위와 눈물을 흘리는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의 물음에 밥 호프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앞줄에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나가보니까 앞줄에 상이(傷痍)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팔을 잃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왼팔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왼팔을, 왼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오른팔을 사용해서 두 사람이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며 밥 호프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저 두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 팔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기쁨을 배웠습니다." 슬픔 많고 고통 많은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원한다면 이웃들의 허물을 덮고 그들의 삶을 세워 관용하는 정신을 배워야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베푸셨던 동일한 관용을 구하여 이웃에게 베푸는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기도가 기쁨을 유지시켜 줍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근심을 빼앗아 가는 근심 걱정에 관한 해결책을 소개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실제로 우리들의 마음 하나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렵게 찾아 온 기쁨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근심에 빠져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방안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님들이 대다수 다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로 인해 기쁨을 회복하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정확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를 드리되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근심을 물리칠 수 있는 놀라운 비결입니다. 감사를 동반하지 못하는 기도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기적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면 기도가 자칫 육신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사도 바울은 기도를 논할 때 꼭 감사를 덧붙여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살전5:17-18)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에서 우리들이 밝혀 발견하는 바와 같이 기도와 감사는 같이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감사드릴 때 매우 만족해 하시며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여주신다고 하심은 곧 우리들의 삶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 이처럼 감사로 기도를 드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기쁨으로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빌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기뻐하라"는 명령으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강조한 것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친히 체험한 사도 바울은 그렇게 기쁨을 누리는 방안으로 세 가지 소중한 방도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살고 이웃에 대해 관용을 베풀며 끊임없이 감사로 기도드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주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육신을 초월하여 성령으로 사는 삶을 뜻합니다. 모든 일에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 안에 있는 멋진 성도들입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 머물게 되면 원수라도 용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능력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루하루의 삶이 천국이 되는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오늘 복된 7월 두 번째 주일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7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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