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0일 주일낮설교 (사람보다 주님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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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0 August 201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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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주님을 보라
8. 10, 2014
本文:사무엘상17:31-37
說敎:崔 仁 根 牧 師
창세기 4장은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끔찍한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그것도 남도 아닌 형이 동생을 쳐 죽이는 비참한 사건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하고 조용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한 단면이 보이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똑 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이에 격분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 눈을 가진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건 앞에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3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동생 아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인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인은 진짜로 보아야 할 하나님과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 채 오직 동생 아벨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루지 못한 채 역사적인 인류 첫 살인자라는 오명을 쓰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타락한 인생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모습은 더 더군다나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두 눈에 비취는 사람들만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으면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기보다 못하면 무시하고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인생을 그르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윤 모 일병이 선임병들에게 맞아 죽은 사건으로 육군참모총장이 사임하는 등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똑 같은 대한민국의 건아로서 신선한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고 있는데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였으면 군대라는 특수사회 속에서 때려죽이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 또한 죽이지만 않았지 사람으로 인한 갈등과 고통을 여전히 체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하며 주어진 삶을 아름답고 복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거듭나서 소중한 한 평생을 너무나도 멋지게 살아갔던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입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하고 또 따라야 할 영원한 진리입니다. 오늘은 우리들의 그릇된 현실을 점검하고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귀를 열고 말씀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사모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보다 주님을 보라!
신앙생활이란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고 사람들로 인한 이해관계로 엮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숱한 갈등과 고통 속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진정 보아야 할 하나님은 잃어버리고 교회에는 다니는데 신령한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만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와 같은 폐단을 없애고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해결책은 또한 무엇인지?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겸손히 말씀으로 돌아가서 삶의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보지 말라!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요 또한 인류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이 지구촌에는 전쟁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 발발한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치열한 전생으로 민간인을 비롯한 수천 명의 생명이 희생되었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사태로 민간 비행기가 격추되어 소중한 민간인이 3백여 명이나 죽고 이로 인해 서방과 유럽은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함으로 긴장이 촉발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서도 반군과 정부군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고 지난 목요일(14년 8월 7일)에는 미국 오바마대통령이 이라크 반군을 소멸시키기 위해 전쟁에 가담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전쟁은 사람을 보아야 하는 가장 극명한 현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꼭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 온 블레셋 군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장수 골리앗이 나타나 온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키가 일단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상17:4-7)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일단 여기에 나타난 그의 키를 보면 놀랍습니다.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했는데 1규빗이 45cm이고 한 뼘이 23cm이니 그의 키는 곧 2m95cm가 됩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나 호령을 하니 이스라엘의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삼상17: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사람을 보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똑 같은 조건인데도 다윗이라는 어린 소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다 두려워 떨며 도망가는데 어린 다윗이 사울 왕을 찾아가 간청하기를, '자신이 골리앗 앞에 나아가 싸우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17:32)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과 어린 다윗을 비교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와 같은 발상으로 소중한 자신의 한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골리앗 앞에 나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2m 95cm라는 거대한 용사가 서 있는데도 어린 다윗은 그 사람을 보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비결이요 용기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그만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놀라운 진리입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을 보는 자는 다윗과 같이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17:48-49)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의 사람을 보지 않는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야 합니다
오늘날 인생을 불행하게 살아가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되 자신과 비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비교하다 보면 상대가 자기보다 나을 때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영등의식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자신보다 못할 때는 무시하거나 교만하게 됩니다. 이 둘 다 인생에 아무 유익이 없는 비참한 자로 전락하게 되는 요인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병사들을 보시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골리앗만 보고 열등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도망하는 비참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다윗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밥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여 나라를 건져내고 왕의 자리를 보존해 준 이 귀한 충신을 사울 왕은 얄팍한 질투심으로 다윗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얼핏 들으면 단순한 것 같지만 이와 같은 자세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없도록 만드는 무서운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Lee Harvey Oswald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사람을 보고 비교하는 지독한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매사 자기보다 잘된 사람을 보지를 못하는 증오심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인기 절정의 John F.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오스왈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주어진 자신의 소중한 삶을 누리지 못한 채 어리석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잘 압니다. 이는 일반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닌 목회자들에게까지도 나타나고 있음을 많이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어리석은 자세를 버리고 다윗과 같이 사람을 보지 않는 절대적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 자신들의 삶도 승리하는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결국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더불어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비로소 자신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다윗이 결국은 한 목숨 내어 놓고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데도 그를 이쁘게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남도 아닌 다윗의 큰 형님까지도 화를 내며 다윗을 오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는 말과 같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이렇게 헌신적으로 나라를 구원한 다윗을 왕인 사울까지 나타나 죽이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위하여 축복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견지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붙잡고 계시는 분은 이웃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오늘 우리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시109:17-18)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불어 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여 이웃을 축복하고 그 축복이 우리들에게 머무는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천 사람의 우군을 두지 말고 한 사람의 원수를 두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 천 사람이 있어도 원수 하나 때문에 우리들의 인생이 끝장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나누며 살다보면 사랑하는 사람들도 만들어 지지만 때때로 원치 않게 적을 만들고 원수를 만들에 될 때도ㅛ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는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들이 복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명성을 얻었다 할지라도 원수가 있다면 언제 어느 때에 그 원수로 인해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을 잃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원수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 왕은 어리석게도 충신을 적으로 만들고 원수로 만들어 스스로 그 원수 갚는데 혈안이 되었다가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비참하게 스스로 죽어야 하는 비운의 사람으로 남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대적 중의 대적인 사울이지만 그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지 아니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랐던 다윗은 바로 사울의 왕권을 계승 받고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자로 거듭나서 자신의 한 평생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그를 능가할 수 없는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을 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 와서 다윗은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골리앗 앞에 당당히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으며 어떻게 그 거대한 적장을 쓰러뜨리고 이길 수 있었을까요?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이 배우고 본받아야 할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입니다. 다음에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상17:34-37)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다윗이 당당하게 적장 앞에 나갈 수 있었던 비밀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평소에 자기와 함께 하시며 그 무서운 사자와 곰의 손에서도 건져주셨은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적장 골리앗 앞에서도 건져내 주실 것이라는 확신, 바로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당당하게 적진 앞에 나아가 적군의 수장을 넘어뜨리고 이기는 숨은 비밀이었습니다. 이렇듯 다윗은 비록 나이는 어리고 인생의 경험은 부족하였었지만, 그 무서운 사자와 곰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거대한 골리앗은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자는 당연히 이렇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갑니까? 오로지 돈이요 권세요 사람입니다. 이번에 비참하게 몰락하고 있는 유병언과 같은 사람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끊임없이 인맥을 만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고 다시 그것으로 사람을 자기 사람들로 만들어서 자기만의 아성을 쌓고 천년만년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였지만 세월호라는 암초에 걸려서 그렇게도 비참하게 혼자 죽어서 썩어져버린 안타까운 종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답게, 그리고 신자답게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오늘보다는 내일을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기드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나라를 쳐들어 온 미디안을 보았을 때는 숨어서 밀을 타작하는 초라한 농부에 불과하였지만 그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3백 명을 이끌고 12만 명을 공격하러 나가는 위대한 용사가 되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아예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골리앗은 일단 키가 2m 95cm였고 거기에다 다윗은 감히 들지도 못할 거대한 칼을 차고 엄청난 것으로 무장하였습니다. 머리에는 놋투구를 섰고 몸에는 놋으로 만든 어린갑을 입었으며 거대한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선 다윗은 어린데다가 들에서 양이나 치던 복장에 손에 든 물멧돌 다섯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세상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Game을 일컬을 때 '다윗과 골리앗'이라고 빗대어 말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 거대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이는 지난주일 들었던 3백으로 12만을 이긴 것보다 더 놀라운 비유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사실을 이처럼 극대화시켜 확인시켜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에 위대한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역사를 많이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대통령은 에이브라함 링컨이라고 합니다. 그가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지만 특별히 남북전쟁으로 온 나라가 동족상잔의 피로 얼룩지고 있을 때 그가 일어나서 한 연설은 케티스버그 연설 다음으로 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바로 1863년 4월 30일 그는 전 국민을 향한 연설에서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기도에 동참해 주시기를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미국의 비극을 해결하는 길은,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의 자비와 용서를 받을 때 인간사회의 얽힌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전쟁을 위시한 인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들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 말씀인 성경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눈을 들어 자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사람을 바라보면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골리앗 밖에는 볼 것이 없지만 다윗과 같이, 링컨과 같이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승리의 멋들어진 내일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똑같이 밥 먹고 똑 같이 돈 벌고 똑같이 죽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은 절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것이 바로 이처럼 사람을 보는가? 하나님을 보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기드온과 같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을 이기게도 하시고 우리들에게 축복도 주시며 우리들을 망하게도 하시고 우리들을 지옥 불에도 던져 넣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인생 변화무상한 사람을 바라보고 따라가다가 망하지 말고 오직 우리들을 이 땅에서도 복되게 하시고 죽어서는 천국으로 인도해 가시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복되게 살아가라고 소중한 목숨을 십자가에까지 내놓으신 하나님을 순간도 잊지 말고 당당하고도 용기 있게 다윗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울과 같이 시기나 하고 자신의 얄팍한 육신의 욕심이나 채우며 적당하게 하나님을 섬기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나라까지도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떨리는 마음으로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결단코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다윗과 같이 확실한 믿음으로 우리들의 삶의 주인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남은 삶을 다윗처럼 승리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8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