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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3일 주일낮설교 (감사를 넘치게 하라)

감사를 넘치게 하라

추수감사주일

11. 23, 2014

本文:골로새서2:1-7

說敎:崔 仁 根 牧 師

지난 화요일(18일) 아침에 KBS에서 방영되는 아침마당을 보았습니다. 대한민국 국영방송국에서 기독교의 진한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방송의 주제는 고 손양원목사님이었고 그곳에는 손양원목사님의 딸 손동희권사와 양 아들로 삼았던 동인, 동신을 죽인 살인자의 아들이 또한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손동희권사님의 발언을 녹취한 일부분입니다.

제가 16살 때, 제 두 오빠 손동인, 손동신이 순교했고,

제가 18살 때, 제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참 사춘기의 나이 때가 아닙니까?

그때 저는 두 오빠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거의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병명은 제가 지었습니다. '총알 공포증'이었습니다. 강박증세이지요.

제가 앉았다가 일어서면 자꾸 어디서 총알이 저를 향해 날아올 것 같아서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밤마다 환청이 제 귀에 들렸습니다.

총알 튀기는 소리가 들리고 오빠들의 발자국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자신의 말처럼 16살의 사춘기 때에 두 오빠와 아버지를 잃은 고통과 두려움은 실로 대단하였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아픔을 이겨내고 권사로서 인생의 마지막을 내다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 모습은 장하고도 대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국영방송인 KBS에서 그토록 기독교의 진한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방송하였고 그것을 제작한 PD는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묻혀 있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며 영화로도 제작하여 이 세상에 알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 손양원목사님께서 두 아들을 순간에 잃고도 9가지로 감사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여순반란사건 때 무장공비에게 동인 동신이를 잃고 장례를 치를 때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을 잠시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이런 보배를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3. 삼남 삼녀 중에서 가장 귀여운 맏아들과 둘째아들을 바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5. 예수 믿고 와석종신해도 복이라 했는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더욱 감사합니다.

7.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써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면서 감사합니다.

9.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안재선이란 무장공비에게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장례를 드리는 가슴 아픈 그 현장에서 드린 고 손양원목사님의 기도문이었습니다. 과연 그분은 진정한 감사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2014년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인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감사를 넘치게 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짧으면서도 강력한 한 말씀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감사를 넘치게 하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은 신, 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감사를 강조하고 또한 실천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아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선포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감사 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외롭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살았으며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사를 넘치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다윗에 이어 사도 바울의 진정한 감사를 찾아보면서 감사주일의 소중한 말씀으로 가슴에 담아두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깨달으므로 감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똑바로 만나고 똑바로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너무나도 고상하고 좋아서 자신의 모든 소중하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담대히 내어 버렸을 정도였습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처럼 그는 예수님을 똑바로 발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제는 그와 같은 예수님 때문에 감사를 넘치게 하는 사람으로 변화를 덧입었습니다.

(골2:1-3)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이렇듯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은 감사를 넘치게 하는 가장 귀한 지름길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손양원목사님이나 그의 딸 손동희권사님과 같은 분들의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손동희권사님이 16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두 오빠를 총으로 쏘아 죽인 그 범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겠다고 할 때 아버지를 붙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손양원목사님이 그 딸을 데리고 서재로 들어가 성경책을 펴고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라고 하신 말씀을 일일이 찾아 어린 딸에게 보여 주면서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이 감사의 주인이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예수님을 바로 알고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감사를 넘치게 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므로 감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지 깊이 깨달으면 그 예수님을 위해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분을 깨달음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그 분을 주님으로 받아서 가슴에 모시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골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귀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귀하고 아름다운 분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그 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의 탕자가 되던지 외인과 같이 깊은 사귐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한 번 보십시오. 그가 주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했다면 그 분의 제자로 3년씩이나 따라다녔겠습니까? 하지만 그 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겉돌다가 결국에는 팔아먹는 어리석은 죄를 자청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합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잘나고 성공하여도 가슴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결코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손해를 보거나 자존심이 상하여도 못견뎌하며 난리난리를 피우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슴에 없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커녕 원망과 불평으로 오로지 자기 유익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가슴에 예수님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게 모신 예수님의 영향을 받아 감사를 넘치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나 사도 바울 그리고 고 손양원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던 가장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를 넘치게 한 가장 멋들어진 인물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감사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음에도 말입니다. 그 자신이 고백한 그의 삶의 단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후11:22-27)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은 거의 홈래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합니다. "감사를 넘치게 하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도 범상한 범위를 넘어 주님을 닮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그 가슴 속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영으로 삶의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의 권면을 가슴으로 받아 예수님을 받은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신 진짜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모신 예수님의 영향력으로 주어진 우리 삶을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영향력은 그 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감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보여 주는 가장 결정적인 메시지가 또 하나 더 남아 있음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는 우리들의 넘치는 감사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가장 확실한 말씀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사도 바울만큼 믿음에 관해 많은 진리를 선포해 놓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의 서신에서만도 거의 170번 이상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을 정도니까 말입니다. 그러한 그가 이제 말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소금의 짠맛과 같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신자는 상상만 해도 가짜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믿음에 관해 가장 떳떳하게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선포해 두었습니다.

(딤후4:6-7)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 그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담대히 스스로 고백할 수 있을 만큼 믿음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앞서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9가지로 묶어 감사를 드렸던 고 손양원목사님 또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아들이 순교당한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역시 공산당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순교하신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렇듯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단단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말세지 말을 맞은 지금 우리들에게 과연 이와 같은 믿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 이전에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게 있습니다. 이렇듯 강력한 믿음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감사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더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호흡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희생하신 예수님을 닮아 감사를 넘치게 하며 사는 진정한 믿음의 심령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카고에 대 화재가 나서 온 시가지가 불바다를 이루었을 때의 일입니다. 각 신문사의 기자들이 화재현장에 도착해보니 건물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고, 더욱이 시가지 한복판에 있던 무디 목사의 교회도 모두 불타버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자들이 무디 목사 곁으로 다가가 "목사님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설교 하셨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성전인 교회가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을 가만 두십니까?"라고 빈정거리며 말하자, 무디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벌써부터 하나님께 큰 교회를 달라고 기도해 왔소. 그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 교회가 불탄 것입니다. 우리가 큰 교회를 헐고 다시 세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불에 태워서 건물을 허는 비용이 들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에 기자들은 어이없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디 목사는 밤중에 화재를 당하여 잠옷 바람으로 겨우 목숨만 건진 빈주먹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들은 다시, "그럼 그 큰 교회를 세울 돈은 가지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낡은 성경책을 내놓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수표와 돈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바닥이 나지 않는 하나님의 금고인 성경책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얼마 안가서 불에 탄 교회보다 더 크고 훌륭한 교회를 볼 것입니다." 무디 목사는 그 화재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전 영국을 뒤흔드는 부흥을 일으켰고, 영국에서는 교회건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디 목사는 영국 국민이 바친 헌금으로 화재가 난 자리에 옛날 교회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주님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를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2014년도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함께 누가 과연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 해답임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깨달아야 하겠고 그 예수님을 가슴으로 영접하고 모셔야 하겠으며 그 예수님을 단단히 믿는 믿음에 굳게 서게 될 때 비로소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친히 그렇게 살고 오늘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입술에 붙은 감사가 아니라 진정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서 감사가 자연스럽게 생활이 되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얼마나 고상한 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이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더 귀하게 가슴으로 받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때는 믿음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눅18:8).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을 읽고 들으며 믿음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무장하게 되면 넘치는 감사는 그 열매로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된 감사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몸과 예물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이처럼 강인한 믿음으로 감사를 넘치게 드릴 수 있으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11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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