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30일 주일낮설교(진짜 믿음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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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30 November 201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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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믿음이 있습니까?
11. 30, 2014
本文:야고보서2:14-26
說敎:崔 仁 根 牧 師
서(西)아프리카 시에라리로 봉사를 갔다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영국인 간호사 윌 풀리(29)가 본국에 후송돼 치료를 받은 뒤, 완치 판정을 받자 또다시 "열악한 환경의 에볼라 환자들을 돕겠다"며 2개월 만에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간 사연이 지난달 세계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그동안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 아프리카 의료 봉사를 갔다가 감염돼 본국에 돌아와 완치된 의료 인력들은 있었지만, 나았다고 현지로 돌아간 이는 윌 풀리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들의 마음을 그의 부모 또한 붙잡지는 못했습니다. 그 부모님의 말씀이 더욱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아들이 되돌아 갈 것이란 걸 알았지만, 우린 그 뜻을 지지했습니다. 본인이 행복해 하는 일인데 말릴 수 없었지요." 역시 그 부모의 그 아들이라 하겠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이미 5천여 명의 시민들이 죽어나간 에볼라 가 창궐하고 있는 죽음의 현장이 아닙니까? 하지만 월 폴리는 그와 같은 에볼라에 감염되어 거의 죽다가 간신히 살아났는데도 또 다시 그곳으로 갔습니다. 돈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불쌍하게 죽어가고 있는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행동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가슴이 뜨끔한 말씀을 증거해 주시고 계십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고 말입니다. 오늘날 잘 믿는다는 사람도 많고 스스로 자기는 믿음이 있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과연 우리들의 진짜 믿음은 무엇으로 평가되는 것일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는 행함이 있어야만 그 믿음이 진정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금이 짜지만 넣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이 믿음이 귀하지만 행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행하는 믿음에 관한 말씀으로 감사의 달을 마지막 보내는 우리들의 속사람을 살찌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짜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진짜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두 가지 놀라운 케이스를 증거로 주셨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으로서 나이 백세에 얻은 고귀한 아들이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아낌 없이 갖다 바치는 행위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왕보다는 적국의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의 결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오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들의 가장 값진 그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기에 아낌없이 내어 드릴 수 있겠는지? 한 목숨을 내 놓고서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서 놀라운 결단을 할 수 있겠는지를 말입니다. 이것이 없는 그냥 그대로의 믿음은 결국 힘도 없고 열매도 없는 가짜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덧 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값진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귀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남은 삶을 승리할 수 있겠는지, 오늘은 이와 같은 진짜 믿음에 관한 진리를 배우면서 풍성한 은혜를 체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모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최고로 모시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며 최상의 순종으로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쫒아 살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벗"이라고 칭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명확하고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생명같이 귀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훈련이나 지식으로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참 믿음이 없다는 예수님의 경고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무자한 삶을 100년이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 같은 축복으로 나이 100살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청년으로 장성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일언반구도 없이 그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 서슴없이 그 아들을 각을 떠서 번제로 바쳐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크게 감동하시고 그에게 더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던 것입니다.
(창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는 말씀처럼 그는 전무후무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토록 살인적인 순종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릴 수 있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말씀을 순종할 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웃을 따뜻하게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진짜 믿음이 있는지의 여부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점검해 볼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약2:14-1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믿음이 있다면 이웃에게 이처럼 무관심 할 수 없다는 말씀이요 이웃의 굶주리고 헐벗음을 예수님의 심장으로 돌아봐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결국 헛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약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이웃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서 구원을 거두시고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마25:41-45)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진정한 믿음은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믿음으로 열매가 맺혀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은 결국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눈 내리고 찬서리나는 춥고 쓸쓸한 계절입니다. 우리들에게 진짜로 믿음이 있다면 이처럼 헐벗은 이웃들을 생각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진수를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첫 성탄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Wampanoag 부족이 있었습니다. 이 부족들은 미 동남부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인디언들입니다. 이들은 1621년 청교도들이 처음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 이 낯선 백인들을 친 형제처럼 따뜻하게 맞아들였습니다. 오랜 항해 끝에 당도한 그들을 배에서부터 작은 배로 마중 나가 육지로 인도하고 기진맥진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병을 치료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수수 재배법을 가르쳐 주어 천신만고 끝에 추수를 하며 생활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미국에 정착한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그 인디언들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인디안 레져베이션으로 몰아 놓고 고사시키고 있습니다. 생명의 은인들로부터 땅을 빼앗고 먼 외곽지역으로 추방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금하시고 심판하시는 동성연애를 합법화 시켜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받았던 축복을 스스로 내던지고 인본주의로 회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양과 염소로 분리되는 말세지말의 심판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짜 믿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니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 행동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학가기 위해 사는 나라가 있습니다. 집안에 고3짜리가 있으면 온 집안식구들이 다 고3이 되어 긴장과 걱정과 수면을 방해 받아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만 들어가 주어도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좋아 할 만큼 대학 들어가기가 어려운 나라이기에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양대학교에 입학한 공부 못하는 한 학생의 이야기가 온통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성적이 중하 이하인 한 학생이 한양대학교에 들어갔으니 화젯거리가 된 것입니다. 19살의 조현욱군이 화제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는 무려 경쟁률이 52.6: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하였습니다. 어떻게 성적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학생이 이 대학에 이처럼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할 수 있었을까요? 이 학생을 합격하게 한 요인은 그의 출신학교 생활기록부에 기록된 오직 한 줄의 멘트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3년 동안 모두가 꺼리는 자폐학생을 따뜻하게 돌봐 주었음." 이 하나의 문장을 보고 대학교에서는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실제로 조군은 모든 학생들이 꺼리는 자폐 클레스매이트를 몸소 짝이 되어주고 모든 불편을 다 도와주며 문제를 해소시켜 부모처럼 3년 동안 돌봐 주었습니다. 학교 입학사정관들은 이와 같은 학생이야 말로 헬렌 켈러를 돌봐주었던 설리반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아닌가 하고 성적을 넘어 우리 시대가 바라는 가장 바람직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합격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공부만 잘하고 이웃을 모르는 그런 개인주의보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품어 안고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필 줄 아는 이런 사람을 인재로 등용한 학교도 위대하지만 이처럼 비록 공부는 남들처럼 잘하지 못했지만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3년씩이나 기꺼이 돌봐주었던 조현욱군과 같은 청년이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정신자세가 믿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끝까지 실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뜻밖에도 기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생이라는 직업은 환영 받지 못하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기생 라합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비록 신분은 기생이지만 그의 가슴에 하나님은 살아 계셨고 그 누구보다 그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2:8-11)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녀가 만약 오늘날 우리들처럼 자신의 신분에 연연하며 염세주의로 생각하고 살았다면 결코 이처럼 담대한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친히 군사들을 보내어 간첩을 색출해 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자신의 집안에 간첩을 숨겨두고 내일을 도모하려는 놀라운 담력과 결단이 과연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강력한 믿음이 없이는 결단코 할 수 없는 용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믿음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함을 하나님은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들도 우리 자신에 대해 당당할 수 있어야 하고 내일의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격상시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우리들을 지으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자신을 원망하며 부끄럽게 생각하며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기생 라합과 같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 주간 통영에서 경찰들이 성매매 단속을 위해 함정 수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주운 성매매를 알선하는 명함에 기록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전화를 받은 24살의 여인이 모텔로 성매매를 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때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이 젊은 여인은 그만 6층 모텔에서 창밖으로 뛰어 내려 자살한 것입니다. 그녀는 어릴 때 엄마를 잃고 가난하게 살아가던 중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어 7살 된 딸과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 할 수 없이 성매매라는 방법으로 간신히 세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소외된 자들이 살아갈 수 없는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왔습니다. 남은 병든 아버지와 어린 아이를 생각하면 더 더욱 가슴이 매어집니다. 우리는 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라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며 만족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을 만드신 분이 하늘의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엄청난 능력이 계시니 반드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한 기생 라합과 같이 때가 되며 반드시 구원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 실제 생활에 유익을 갖다 주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하나님도 우리들의 미래도 모두가 다 헛것이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강력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믿음으로 기생 라합과 같이 현실을 넘어 구원으로 복을 누리는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2014년도 감사의 달이 마지막 저물고 있습니다. 감사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신앙행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진정한 믿음에 관한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에 대한 굳은 신념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이웃 없는 믿음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없다면 결국 하나님도 이웃도 소용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이 행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역사를 만들어 내는 놀라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고 무조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강력한 행위가 있어야 하며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예수님의 심장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구별하시어 예수님의 피와 생명으로 구원해 주신 존재임을 확신하고 비록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라합과 같이 기생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때가 차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하루하루를 행동하며 당당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들을 믿음이 있는 자라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이 식어간다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 서 있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성도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믿음으로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세에 진짜 복 받는 그런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11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