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7일 주일낮설교(이웃 사랑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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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aturday, 06 December 201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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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이 믿음입니다
12. 7, 2014
本文:누가복음5:17-26
說敎:崔 仁 根 牧 師
작가이며 유명한 연사인 레오 버스카글리아가 한번은 자신이 심사를 맡았던 어떤 대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대회의 목적은 남을 가장 잘 생각할 줄 아는 아이를 뽑는 일이었습니다. 레오 버스카글리아가 뽑은 우승자는 이제 겨우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옆집에는 최근에 아내를 잃은 나이 먹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이 우는 것을 보고 어린 소년은 노인이 사는 집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의 무릎에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가 나중에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노인이게 무슨 위로의 말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할아버지가 우는 것을 도와주었어요."
그렇습니다. 이웃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때로는 이웃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공감해주고 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웃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도우는 일은 그 다음에 해도 결코 늦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오늘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불쌍한 이웃을 들것에다 들고 이웃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몰려 있어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들것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의 기와를 걷어내고 들것을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곳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함께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탄의 달 12월을 맞은 우리 모든 심령들이 이 연말과 연시에 무엇을 하며 진정한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지, 그 해답을 함께 찾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이웃 사랑이 믿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말과 행동 그 어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상황을 기록한 4복음서의 내용은 한결 같이 제자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평가하고 가르치신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너무나도 아름답게 헌신하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주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칭찬이나 교훈정도가 아닌 믿음의 본질을 말씀하고 계시기에 오늘 우리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부터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5:18-20)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에서 우리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헌신자들을 향하신 우리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입니다.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한 헌신과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종도 "이웃 사랑이 믿음입니다"는 제목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행위실천의 사도 야고보는 이렇듯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은 곧 죽은 것이라고 단정하고 행함으로서 믿음을 보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약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입술에만 붙은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맞은 지금 참으로 이처럼 행동하는 믿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교회도 성경말씀도 심지어는 하늘의 하나님도 이용하고 있을 정도로 오늘날 진정한 믿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공무하면서 깊은 깨달음과 결단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서로 함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풍으로 쓰러졌는데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5:18-19)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 보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위기를 당한 다른 한 사람을 돕기는 쉽지만 이렇게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같은 마음과 사랑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감동을 받으시고 그 여러 사람을 동시에 귀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눅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도와주고 있는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기 힘든 선행은 가슴에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슴에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더불어 살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소중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 자신에게 물어 보면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도 어렵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한 번 더 인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10:30-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 이었습니다. 이들의 신분이 왜 더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까? 바로 종교지도자들인 그들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한결 같이 반드시 도와야 할 어려움 당한 이웃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이론으로만 지키고 있던 믿음을 실제적으로 삶 속에서 실천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믿음을 소유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돕는 자가 그만큼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종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많은 自問自答(자문자답)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내가 새 차를 사서 타고 가는데 저렇게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발견했다면 그 차에다 그렇게 피 흘리는 사람을 태우고 병원으로 갈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결코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마음의 생각 또한 아닙니다. 온 몸으로 행동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혼자서도 이렇게 행동하기가 어려운데 함께 여럿이서 이렇게 복된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칭찬을 받은 이 사람들은 진정 오늘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귀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혼자서 무엇을 하는 것 보다 함께 같이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함께 모이고 함께 예배드릴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이렇게 함께 모이지 못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정확하게 정의해 두었습니다.
(잠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고 말입니다. 이 두 구절은 두고도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소중한 말씀입니다. 함께 할 줄 모르는 믿음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2월 2일자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가슴을 찡하게 해 주었습니다. 에볼라가 창궐하고 있는 서부아프리카로 한국의 의료봉사단들이 당당하게 나가 그들을 진료해 주는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이 그곳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열린 의사회(이사장 고병석) 의료봉사단이 지난달 22~26일 남아공에서 5일간 의료봉사를 했다. 의사, 약사 등 의료진 8명을 비롯해 24명으로 구성된 봉사단은 조슬로브 지역 5개 학교 학생 150명을 비롯해 주민 900여명을 진료했다. 이번 봉사단은 치과, 한의학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4개 진료과를 개설했는데 이비인후과에서 감기 환자, 한방과에서 골절 환자까지 보는 등 사실상 종합병동이었다.
아픈 자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닌 여러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아픈 자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참으로 귀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이 함께 모이면 선한 일을 도모하기 보다는 나쁜 일을 도모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고려대학교 의대에 다니는 몇몇 또래들이 강원도 바닷가로 그룹미팅을 나갔다가 밤에 같은과 여학생 하나를 번갈아가며 성폭행 했다가 그 귀한 학교 그 귀한 과에서 퇴학을 당하고 감옥으로 간 사건은 또래 집단이 너무나도 쉽게 범죄에 휘말리게 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케이스였습니다. 이렇듯 함께 모여 선행을 하는 것은 타락한 인생들에게는 그리 쉽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한 중풍병자를 이렇게도 끝까지 돌봐주는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 수 있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이웃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처럼 우리들의 유익보다는 아프고 가난한 자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줄 줄 아는 사랑의 신자들이 먼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생각해 봅니다. 4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인데 하루에도 43명이나 자살하는,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자살이 가장 많다는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그 누구도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데 그렇게 이웃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주며 사랑의 손을 내밀어 자살 직전의 불쌍한 사람을 구한 미담이 있어 여기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2012년 겨울 지하철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김건희 씨(32·극단 '배우는 사람' 대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던 노숙인이 점차 선로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발견했다. 김 씨는 그를 붙잡은 뒤 마침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갖고 있던 귤을 건넸다. 겉에 웃는 얼굴을 그려놓은 귤이었다. "선물은 사람한테 주는 것 아니오...." 자신이 짐승처럼 느껴져 죽으려 했다던 그 노숙인은 "나도 사람이니까 살아야겠네"라며 김 씨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김 씨는 이후 귤에 받는 사람의 캐리커처를 그려 보육원, 소년원생, 노숙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 기사는 참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고 또한 깊은 감동을 던져 줍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귤이 얼마나 비싸지도 않는데 얼마든지 가슴이 차가운 사람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살리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우리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한 발자국 다가 서 주는 따뜻한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여럿이서 데리고 온 이 불쌍한 중풍병자를 영육간에 간단하게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눅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5:24-25)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말씀입니까? 우리들이 조금만 가슴을 열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면 이처럼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더불어 큰일을 일구어 낸다 해도 그것이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람을 위한 행위였다면 자원봉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목적이 예수님과 연관이 되어져야 비로소 믿음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렇게도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에게는 점점 관심이 멀어지고 모든 정보와 사람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 바로 지금이 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 마귀는 우리들 곁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성경공부나 기도회 모임을 금지시키고 관공서에서 십계명과 십자가를 떼어내고 나라가 공식적으로 주관하던 전국기도의 날을 폐지시키고 심지어는 크리스마스 카드에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몰아내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 우리 예수님께서 서 계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오늘 우리는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조건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눅5:17-20)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귀하고도 복된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밑줄 친 부분들을 가만히 묵상해 보신다면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는 어떤 전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께 병 고치는 능력을 주셨고, 병든 자는 스스로 올 수 없었지만 타의에 의해서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끝끝내 예수님 앞으로 환자를 들여놓으니 예수님께서 순식간에 그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 말씀은 과연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를 단적으로 가르쳐 주는 놀라운 비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명약 중의 명약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과 같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 싶어 세상에서 방황하고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이면 해결 될 것인가 싶어 돈을 따라다니는 어리씩은 삶을 살고 있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을 다 가진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헛것을 쫓은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세상의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만 제대로 만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 102장의 주인공인 죠지 베블리 쉬에(G. B. Shea)가 바로 그렇게 산 아름다운 장본인입니다. 그는 일찍이 시카고에서 오페라 가수로 명성과 부귀를 한 몸에 받아 누리던 세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전도 집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이 고백한 그대로 이 세상의 부귀와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쫓아 평생을 빌리그레함 목사님과 함께 전도활동에 헌신하며 멋들어지게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귀하고 덜 귀한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리석은 돈과 세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묵묵히 생각하며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는지 어렵지 않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소중한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한 채 비난이나 하고 있다가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똑바로 알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녹5:21-2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와 병을 고치시는 능력 등 우리들을 위해 못하실 일이 없는 놀라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열린 가슴으로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들이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2014년도의 마지막 달인 송년의 달 12월을 맞았습니다. 감사의 달을 넘어 성탄의 달을 맞은 것입니다. 맨날 입으로만 감사하고 성탄을 노래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성탄 캐럴이 울려 퍼져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자니 우리들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감사나 믿음이 없는 성탄은 결국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들의 잔치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귀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함께 어우러져 가난하고 소외된 작은 이웃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쌍한 이웃들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몇 가지 도와 주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로 인도해 오는 것이 이웃을 위한 최상의 선행이라는 사실을 또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웃들에게 이와 같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한 걸음씩 적극적으로 접근해 가는 진정한 신자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먼저 믿음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하겠기에 지금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된 날 하나님 전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귀한 믿음으로 한 스텝 업그레이드 되어서 기쁘고 즐거운 성탄과 새해를 맞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을 만들어 가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예수님의 풍성한 치유와 축복이 가득차고 넘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12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