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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9일 주일낮설교(우릴 화목케 하시려고!)

우릴 화목케 하시려고!

고난주일
3. 29, 2015
本文:에베소서2:12-19
說敎:崔  仁  根  牧 師

[지난 24일 독일 저가 항공사 저먼윙스의 에어버스(A320) 여객기가 프랑스 알프스 산맥에 추락한 사고는 부조종사인 안드레아스 루비츠(28)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브리스 로뱅 검사는 26일 "기장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루비츠가 조종실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채 의도적으로 비행기를 추락시켰다"고 밝혔다.루비츠는 이날 오전 10시 1분 기장인 파트릭 존데하이머와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독일 뒤셀도르프를 향해 이륙했다. 뉴욕타임스와 AFP 통신에 따르면, 조종실 음성녹음장치(CVR)에는 비행 초반 "아주 부드럽고, 아주 좋다(very smooth, very cool)"고 대화한 내용이 남아있다. 이후 기장 존데하이머가 착륙 계획에 대해 설명할 때, 루비츠의 대답이 퉁명스럽게 바뀌었다고 루뱅 검사는 밝혔다.

이륙 약 20분 후 비행기가 순항 고도인 1만2000m에 도달하자, 기장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루비츠는 안에서 문을 잠갔다. 기장이 다시 들어가기 위해 조종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었다. 기체가 하강을 시작하자, 기장은 더욱 다급하게 두드렸다. 나중에는 거의 부술 듯 문을 때렸지만 소용없었다. 2001년 미국 9·11 테러 후 조종실은 외부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외부 충격에 강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이후 CVR에는 추락 때까지 루비츠의 숨소리를 제외하고 아무런 소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추락 직전까지 승객들은 비행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던 듯하다. 로뱅 검사는 "추락 마지막 순간에 (승객들의) 비명이 들린다"고 말했다.루비츠는 조종간을 잡고 시속 700㎞의 속도로 알프스산맥을 향해 비행기를 몰았고, 기체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상은 조선일보 3월 27일자 보도를 그대로 카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부조종사가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각오를 하고 이처럼 비행을 시도한 것은 자신의 여자 친구와의 불화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 여자와의 관계가 잘못되자 그는 죽을 것을 각오했고 결국은 이렇게도 끔찍한 사고를 유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비행기 안에는 조종사와 승무원 등 15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어떻게든지 불화를 넘어 화목의 길을 찾아야 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들을 화목케 하시려고 그 무서운 십자가도 마다 않고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와 같은 주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함께 배우면서 진정한 고난주일의 의미를 믿음의 가슴으로 되새겨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릴 화목케 하시려고!

사실 오늘 우리들도 많은 불화를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저런 일로 얽히고 섥혀서 인간관계가 편지 못하고 미움과 원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인간관계에만 국한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이르고 있음도 또한 사실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함으로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필수적인 구원의 역사가 사라지고 먼 인생 여정에 축복의 끈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나, 가지가 잘린 꽃과 같이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이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너 하나 없어도 아무런 상관없어.' 하면서 잘 살아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어진 유리그릇처럼 앙금은 남아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잘못 되면 급기야 살인과 보복으로 나타나 지난 독일 비행기 사고처럼 끔찍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가장 우선순위가 관계 회복이고 그것을 통해서만 서로 화목하며 사랑하게 되어 인생 여정이 행복과 평안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들의 현실

성경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원수 된 관계였다고 말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왜 우리들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그동안 새해전교인수련회와 로마서 강해를 통해 수차례에 걸쳐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간단하게 오늘 본문이 증거 하는 대로 다시 한 번 더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엡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한 여파로 인간관계 또한 파탄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이 극한 상황에 다다르게 되면 독일 비행사고와 같은 극단적이고도 비참한 결과를 만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28살밖에 안 된 젊은이가 여자 하나와의 비뚤어진 관계로 인해 자기도 죽고 소중한 다른 사람을 150여명이나 죽이고 고가의 비행기를 박살냄으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만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계시던 주님은 결국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던져 이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시고 새로운 변화와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화목의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3년씩이나 따라다니며 신선한 희망과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엄청난 재능과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조만간 식민지로 괴롭히는 로마를 때려 부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현실화 되어 갔습니다.

(막10:35-3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야망과 정 반대로 악당들에게 잡혀가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끌려가서 처형당하게 되자 그들은 여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그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26:55-56)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맡기셨던 그 소중한 사명 또한 버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요21:2-3)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권세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아예 하나님과 화목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등의 근본 진리에는 관심조차 갖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를 지셨는지? 그 해답을 분명하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원수 된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엡2:16-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듯 고귀하신 살을 찢고 피를 쏟으시며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은 우리들에게 화평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시고 우리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친히 감당하시고 희생되셨던 것입니다.

핀란드에 아주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늘 근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관계로 왕위를 물려줄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공주를 시집보내고 사위를 아들 대신 왕 위에 올리기 위해 전국에 방을 내고 인물을 찾았습니다. 나라에 내노라하는 수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활쏘기 창던지기 등 무술을 통해 인물을 정리하니 정예병 20여명이 선택 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들에게 100일의 시간을 주면서 "하늘과 땅, 이웃과 이웃을 아우르는 나무를 구해오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도대체 얼마나 큰 나무라야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아우를 수 있겠는가?"하며 궁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 중에 쟌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천하에 고아로 자라다가 수녀원에서 젊은 때를 보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수녀원으로 달려가 엎드려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몇날 며칠을 기도하며 엎드렸던 그가 일어나 수도원을 나오려다 우연히 뒤돌아보는데 그의 눈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바로 저것이다. 십자가! 저 십자가만이 하늘과 땅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사랑으로 화평하게 하는 보배다!" 그는 미련 없이 십자가를 만들어 왕 앞으로 쫓아갔습니다. 왕은 이처럼 명석한 쟌 페로를 자신의 후계로 삼고 공주를 주어 결혼 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이처럼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이어주는 평화의 상징은 없습니다. 오직 피 흘려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해 주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이처럼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는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고귀하신 피를 쏟아 십자가로 화목케 하시므로 우리들의 신분은 세상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한 상에 둘러앉은 하나님의 식구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성경 다른 곳에서는 빛이라고 표현해 두었습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감히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빛"이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금도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감히 우리들을 빛이라고까지 불러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제는 어두움과 상관이 없는 빛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릴 위해 피를 쏟고 생명을 버려 하나님과 화목케 해주신 예수님 앞에서 오늘 우리들이 다짐해야 할 삶의 신선한 목표인 것입니다. 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주님 닮은 희생인 것입니다. 착함이 있어야 희생할 수 있고 의로움이 있어야 희생할 수 있으며 진실이 있어야만 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희생은커녕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만이라도 희생으로 그들 앞에 예수님의 향기를 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 엄청난 고난을 감내하시면서 온 몸으로 십자가를 지시므로 희생을 친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새 중에 Pelican(펠리컨)이라는 종류의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새 중에 가장 모성애가 강한 새라고 합니다. 이 새는 주로 겨울에 부화를 하는데 새끼에게 먹일 먹이가 없으므로 어미 새는 자기 가슴의 살을 새끼들에게 떼어 먹이며 거기에서 흐르는 피로 새끼들을 키워 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는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제롬이라는 중세기의 성자는 직접 이 펠리컨에 대한 기록을 남겨 두었습니다. 뱀에게 잡혀 거의 죽을 번 한 새끼를 구해낸 어미 펠리컨은 자신의 가슴을 부리로 뜯어 새끼에게 먹이고 자신은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와 같은 펠리컨을 예수님의 희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채 살을 찢고 피를 쏟아 또 다른 생명을 구하는 이와 같은 희생은 참으로 눈물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지금 고귀한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잊을 수 없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째는 잉태하고 낳고 기르신 부모님이시고 다음은 독생자를 십자가에까지 보내 주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저절로 존재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희생으로 말미암아 얻은 고귀한 생명이므로 우리들도 그 생명 헛되지 않도록 값진 희생으로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우리들의 남은 삶이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으로 열매를 맺히게 되시기를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5년도 고난주일입니다.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려고 고귀한 생명조차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신 우리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가슴으로 기억하는 귀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와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빛처럼 소중한 존재로 회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삶다운 복된 삶으로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는 것이요 그 주님의 희생을 본 받아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복된 열매를 맺히며 사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고귀한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못난 삶이 아니라 이웃과 주님을 위해 값진 희생을 감당할 줄 아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고난주일과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를 통해서 이와 같은 선한 결단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 받으시고 신선한 축복으로 회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모쪼록 오늘 복된 고난주일 예배를 드리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아름다운 결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3월 29일
고난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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