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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5일 주일낮설교(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주일

4. 5, 2015

本文:에베소서2:12-19

說敎:崔 仁 根 牧 師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오직 그 주님만을 위해 일생을 온전히 다 바쳤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길이 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부활에 관한 가장 강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는 이미 후대에 숱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거짓으로 호도하려는 사실을 예감하고 이렇게 분명한 글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의 예상과 같이 오늘날까지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2천년을 지나오면서 내로라하는 잘난 사람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엄청나게 부인해 왔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칼 바르트는 부활사건을 하나의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빈 무덤 자체가 부활 사실을 역사적 사건으로 증거하는 구실을 하는데 별 효과가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벌써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학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부활 사건의 역사적 증인들을 열거한 다음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신학적인 표현을 쓴 것은 곧 부활사건을 증인들이 역사적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신학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부활 사건을 이렇게 하나의 계시로서, 그것도 "참 역사"의 차원에서만 일어난 계시적 사건으로 보려고 함으로써 부활의 역사적 성격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볼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실재철학의 체계 위에서 재해석하여 그 역사성을 배제하려고 합니다. 볼트만에게 있어서 관심사는 역사상의 객관적 사건 자체가 아니라 역사와의 "대화"였습니다. 부활 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 사실성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참 존재"의 의미란 것입니다. 부활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이기 때문에 비신화화 작업을 통한 참뜻을 찾아야 하며 그것은실재적 해석으로만이 가능한 것으로 봅니다.

반 뷰팬은 예수의 부활을 하나의 제자들이 받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강한 "인상" 정도로 보고 "제자들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하나의 심적 현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아는 것은 무익하며 예수님을 바로 알려면 예수님이 가지셨던 [자유성]의 빛을 통하여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예수님의 "자유성"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를 감당했던 그 자유성이 제자들에게 전입되는 사건이야말로 부활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존 에에 티 로빈슨은,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 현존하는 교회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교회를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실질적으로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육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로서의 몸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일종의 극히 유치한 "교회론"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역사적인 육체적인 부활 대신에 집단적(교회)인 비역사적인,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활이 가지는 어떤 종말론적인 성격이 무시되고 어디까지나 현세적이며 오늘날 삶과 관련된 하나의 새로운 삶의 스타일 창조에 그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가지 부활사건에 대한 해석은 그 강조점에 있어서 각각 일리가 있다할지라도 부활의 역사성을 외면한 채 그 의미성만을 강조하며 마치 하나의 도덕철학운동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 있었던 없었던 그 설화를 하나의 계기로 삼아 주어진 오늘을 [부활의 사건화] 해야 한다는 것은 벌써 기독교 복음에서 떠난 하나의 윤리철학인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허구의 종교가 아니라 역사 속에 계시된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요 나신 해는 인류 역사 연대의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골고다 언덕에서 죽었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렇게 공간성과 시간성을 지닌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 세계 속에 예수님은 오셨고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사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천사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정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롬1:2-3)을 알리는 기쁜 소식임을 밝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는 까닭이나(롬14:9) 또 그리스도가 되신 것(행2:31-36)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것(롬1:4)도 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가장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믿지 않는 참다운 기독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을 체험적인 자신의 간증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증거를 통해 우리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성경적인 증거와 사도 바울의 역사적인 실제적 증거를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모쪼록 듣고 은혜를 받아 신앙생활의 본질인 부활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을 핍박하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살기까지 등등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행9:1-3)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전하는데 일생을 다 바치게 되었을까요? 그는 이에 대한 고백을 사도행전에서 두 번씩이나 거듭 간증하고 있습니다(행9장, 22장참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비몽사몽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보고서야 믿는 믿음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더 크다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부활절 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처럼 보지 못했지만 믿는 자가 되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복된 자라는 칭송을 듣는 귀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복 드립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나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모두가 성경대로 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성경을 담보로 외치고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판사에게는 법전이 전부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고 들고 있는 법전이 유죄라고 기록되어 있으면 그 앞에 있는 피고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그 앞에 있는 피고가 얄미워도 그가 들고 있는 법전이 무죄라고 가리키면 그는 당연히 무죄입니다. 이렇듯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위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말씀이 그렇다 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학, 박사가 아니라 해도 그것은 그런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학, 박사가 그렇다고 아우성쳐도 성경 말씀이 아니라 하면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믿고 또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책을 쓰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는 바로 '성경이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다운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과연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지 찾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럼 함께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마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행2:23-24)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이상의 말씀들은 한결같이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성경의 증거들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생전에 친히 증거하신 내용도 많이 있습니다.

(마20:18-19)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이보다 더 확실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증거해 주신 자신의 부활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예수님 부활에 관해 진실공방을 하는 것은 무의미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명확한 성경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역사적인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고전15:4-8)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법정에서는 사건 현장을 보았다는 증인의 고백이 가장 유력합니다. 27년 전에 20대 초반의 흑인 청년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흑인 성폭력범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찰은 피해여성과 이 청년을 대질 시켜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바로 저 사람이다!"고 울부짖었습니다. 더 물어 볼 필요도 없이 그 청년은 성폭력범으로 지목되었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어느 날 진범이 잡혔습니다. 억울한 그 청년은 5백만 불의 보상금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증인의 고백이 얼마나 강력하게 법정에서 효력을 발하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 증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생생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그 주님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롬1:2-5)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의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막연하게 믿어 왔던 우리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다시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하는 것인지?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다면 결국 죄인 된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신앙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단 한 두 가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릴 위해 죽으시고 우릴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살려 내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행2:23-24)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2) 먼 훗날 우리들도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이 지구촌이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일정한 때만 살고 죽기 때문에 반성도 하고 깨닫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신앙은 이처럼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누이 마르다에게 이와 같은 고백을 먼저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서슴없이 담대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당장에 살려 내셨습니다.

(요11:42-44)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더 무슨 증거가 또 필요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우리 주님의 능력을 믿고 나중에 우리들이 죽을지라도 다시 오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다 다시 살려 주님 계시는 곳으로 인도하실 줄을 확신해야 합니다.

(요14:3-4)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믿음으로 우리는 삶의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승리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1899년 미국에서는 유명한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불신자로서 성경을 헐뜯고 기독교의 교리들에 반대하는 논증을 펼치는 데 인생을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전자는 잉거솔이라는 육군 대령이었는데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불멸성에 관해 행한 강연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불리워질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며칠 동안이나 집에 안치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가 그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시체가 썩어 들어가 가족의 건강에 염려가 되었으므로 치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는데 화장터의 광경이 너무나 참담하여 그 중 몇 장면은 신문에 실려 미국 전체에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잉거솔은 부활을 부인하는데 그의 훌륭한 지성을 사용해 온 사람이었지만 죽음이 찾아 왔을 때에는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의 친족들과 친구들에게 그의 죽음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비극으로 받아들여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해에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무디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 자신과 가족들에게 승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무디는 얼마 동안 차츰 쇠약해져왔으므로 가족들은 차례를 정하여 그 곁에서 돌보았습니다. 그가 죽던 날 아침 침상 곁에 서 있던 아들은 그가 "이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버지, 꿈을 꾸고 계신 거예요?" 아들이 말하였습니다. 무디는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야, 윌, 이것은 꿈이 아니야. 나는 여러 문들을 보았고, 어린 아이들의 얼굴도 보았다." 한동안 무디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기운을 잃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이 죽음인가? 그리 나쁘진 않구나. 어두운 계곡도 없고, 참으로 기쁘고 영광스럽다." 이번에는 그의 딸이 곁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엠마, 그렇게 기도하지 말거라.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다. 오늘은 나의 대관식 날이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아니?" 그 후 바로 무디는 하늘로 영접되어졌습니다. 장례식에서 가족과 친구들은 함께 기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을 나누고 찬송도 불렀습니다. 그들은 다음의 말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무디의 죽음은 그러한 승리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5년도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들을 위해 담대하게 십자가에까지 올라가시고 거기에서 망하는 자와 같이 죽으셨지만 우리 주님은 당당하게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을 부인하려고 그리고 또 숨기려고 세상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엄청난 시도를 거듭해 오지만 이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천하도 바꾸지 못할 성경이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고 그것을 두 눈으로 가슴이 열린 영으로 확증한 증인들이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동정녀 마리아가 남편 없이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믿음으로만 가능한 역사를 예수님의 부활에서도 또 다시 확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분명한 부활신앙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생활 속에 활용하고 그렇게도 무섭고 두려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복된 부활절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복 받은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부활신앙으로 하나님을 새로운 차원에서 만나시고 그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신선한 축복을 자손만대에 받아 누리시는 그런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4월 5일

부활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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