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2일 주일설교(조금만 욕심을 버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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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2 April 201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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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욕심을 버려도!
4. 12, 2015
本文:양고보서1:9-18
說敎:崔 仁 根 牧 師
요즘 SNS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떠돌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어 만든 우화인데 그런 대로 우리들에게 한 번쯤은 생각하게 하는 교훈이 있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두 눈을 실명하여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있었습니다. 이 소경의 소원은 평생에 눈 한 번 떠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소문을 들은 부엉이가 마음에 감동이 와서 그 아저씨를 찾아 갔습니다. "아저씨, 저는 밤에만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실 낮에는 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내 눈을 낮에 아저씨에게 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밤에는 꼭 저에게로 돌려주셔야 됩니다." 그 남자가 깜짝 놀라서 대답하였습니다. "부엉아, 너무나도 고맙구나. 물론 밤에는 꼭 돌려주고말고. 나도 밤에는 자야 하니까 사실 눈이 없어도 괜찮아."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온 세상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아저씨는 너무나도 행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꼭 부엉이에게 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생각했습니다. '이 눈을 내가 온전히 다 가질 수 있다면 밤낮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보면서 복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 아저씨는 부엉이가 없는 곳으로 떠나 부엉이의 눈을 돌려주지 않은 채 자신이 다 가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서서히 눈이 침침해지더니 그만 앞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엉이는 속히 그 부엉이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와 부엉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부엉이는 눈이 없어 먹이를 구하지 못한 고로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저씨에게 원망섞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저씨, 왜 그러셨어요? 약속을 지켜주셨다면 아저씨도 저도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잘 살 수 있었을텐데... 아저씨께서 욕심이 넘쳐 내 눈을 자기것인냥 가지고 도망가셨기에 나도 죽고 아저씨도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하고는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상심하던 아저씨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아저씨가 조금만 욕심을 버릴 수 있었다면 이런 불행한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삶을 그르치고 관계를 깨뜨려버릴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욕심을 버릴 수 있어도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보다 더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 중에 하나인 욕심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듣고 깨달아서 귀한 인생 욕심으로 인해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풍성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조금만 욕심을 버려도!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과 단절 되는 가장 무서운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바로 욕심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해 두었습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말입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우면 하나님과 단절되는 죄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욕심이 얼마나 지독하면 우리들을 사망에 이르게 만들겠습니까? 설마?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짧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실로 입증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이라는 낙원과 같은 멋진 곳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각양 체소며 과일이며 산해진미의 재료가 되는 각 종 짐승들도 그냥 넘쳐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시기 위해 그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그 열매만큼은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태초의 사람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땀 흘리지 않고 다 누리며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한 가지 까지도 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순간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거나 거역하므로 생겨나는 무서운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요일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인이 된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야만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이 한 마디 말씀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이라는 그리 대단하지 않는 것 같은 우리들의 삶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심판이 아니라 축복으로 멋진 삶을 살아가려면 이처럼 무서운 독소인 욕심을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오는 요인
우리는 사람마다 욕심의 도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욕심이 많고 또 어떤 사람은 욕심이 덜하기도 함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흥부와 놀부'라는 이야기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사람들의 욕심이 선천적이라고 치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심이 타락의 강도와 불신의 강도에 비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78:12-2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생하게 존재했던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서 인간의 탐욕이 얼마만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게 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의 탐욕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그 엄청난 구원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실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들의 인생을 복되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자기의 것으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전해 주시는 아주 소중한 말씀을 그 증거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12:15-21)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떻습니까? 욕심의 요인이 하나님을 떠나 인본주의적 재물에 치중하고 있음을 의심의 여지없이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욕심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가 되고 결국은 사망으로 그 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음으로 굳게 서고 욕심으로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경기 시흥 시화호 토막시신 사건의 피의자 김하일(47·중국 국적)이 돈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 홧김에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 아내를 살해한 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8일 시흥경찰서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일 오전 7시 야간근무 후 경기 시흥 정왕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부인 한모(42·중국 국적)씨가 "중국에 있는 내 계좌로 돈을 부치라"고 하면서 부부싸움이 시작됐다. 화가 난 김씨는 집에 있던 둔기로 한씨를 내리친 뒤 목 졸라 살해했다.
김씨는 경찰에서 "아내의 중국 계좌로 돈을 모아 나중에 집을 사기로 약속했는데, 아내가 중국에 있는 자신 명의의 계좌로 돈을 부치라고 계속 잔소리해서 홧김에 살해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흥경찰서 관계자는 "애초 김씨와 한씨는 한국에서 번 돈을 가족이 있는 중국에 보내 나중에 집을 살 계획이었다"며 "약 3년 전부터 김씨가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하면서 한씨와 불화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와 한씨 사이엔 19살 난 아들이 있으며, 아들은 한씨의 어머니와 함께 중국 길림성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을 살해한 뒤 김씨는 1일 저녁 직장에 출근했다. 다음날인 2일 오전 김씨는 원룸 화장실에서 아내의 시신을 훼손하고, 출퇴근용 자전거를 타고 시화멀티테크노밸리(MTV) 공사현장으로 가 시신 일부를 시화호에 버렸다. 시신의 몸통 부위는 물살에 3㎞가량 대부도 쪽으로 떠밀려 와 오이선착장 부근에서 발견됐다. 집에 돌아온 김씨는 다시 머리와 양손·발을 시화방조제 대부도 방향 시작점 부근의 바다 쪽에 유기했다.
김씨는 자전거를 타고서는 한 번에 시신을 모두 버릴 수 없어 두 번에 걸쳐 다녀왔다고 경찰 조사에서 말했다. 경찰 수사망이 좁혀오던 8일 오전 7시30분쯤 김씨는 미처 버리지 못한 아내의 양팔과 다리를 가방에 넣고 나와 조카가 사는 건물 옥상에 유기했다. 경찰은 김씨가 유기한 나머지 시신을 앞서 찾은 시신 일부와 대조해 일치하는지 확인한 뒤 오전 10시쯤 김씨를 긴급 체포했다. 부검 결과 숨진 한씨의 사인은 '경부 압박에 따른 질식사'로 밝혀졌다-4월8일 조선일모 기사 중에서
과연 돈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끔찍한 범죄로 연결되고 말았는지? 인간의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해 주는 단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의 배우에 돈과 도박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모두가 욕심에서 비롯된 결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도박에 빠지는 이유가 일확천금을 노리는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 욕심을 조금만 다스릴 수 있어도 불행을 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을 거두어 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우리는 앞서 욕심이 단순한 인간적인 약점으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신뢰문제에서 비롯되는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굳이 인간적인 욕심이라는 어리석은 방법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이 욕심이라는 장벽을 걷어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는 매우 단순한 논리이지만 또한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에 관한 우리 예수님의 말씀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막4:18-19)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여기에서 우리 예수님은 말씀이 우리들에게 역사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이 바로 새싹을 덮어씌운 가시덩쿨과 같은 우리들의 온갖 욕심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욕심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이 욕심을 거둬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에 욕심을 많이 부렸던 가룟 유다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는 스승이신 예수님까지도 돈에 팔아 넘길 정도로 돈에 눈이 어두워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해서 돈을 가졌지만 결국 그 돈을 자신을 위해 멋지게 쓰지 못하더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그렇게 스승까지도 팔아서 손에 넣었던 돈을 어떻게 했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다.
(마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왜 그렇게도 돈에 혈안이 되어 스승까지도 팔아서 챙긴 그 귀한 돈을 왜 도로 갖다 버리고 목숨까지도 던져 죽는 이와 같은 끔찍한 결론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요? 이것이 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돈이란 가진다고 자기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는 것이라야 진정한 복이 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억지로 취한다고 자신이 누리며 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서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잠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야 비록 적은 것이라도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비록 조금이라도 우리들과 하나님을 가로 막고 있는 욕심의 넝쿨을 걷어내고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도록 신선한 변화와 결단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욕심을 걸러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모르게 우리들의 속사람을 붙들고 있는 우리들의 욕심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무거운 가면으로 가리우고 있어서 그렇지 우리 인생들 중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나이만큼이나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이와 같은 욕심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들이 사는 날 동안 해결해야 할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와 같은 문제를 우리 스스로 풀어 가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길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1) 욕심은 사탄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니 그들을 대적하라
우리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죄로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은 이미 많이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한 인생들은 사탄 마귀를 섬기며 살아왔음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엡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욕심의 출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 마귀였고 그들을 따르는 우리들의 육체였습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께서 이미 선언해 두신 진리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욕심에서 해방되려면 먼저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 마귀와 육체에서 자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우리 스스로는 결코 이 욕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실망시키는 우리 내면의 욕심문제를 단순하게 자신만의 그릇된 특성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이 욕심의 문제는 실상 영적인 문제요 신앙적인 문제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인간의 가치관의 변화나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욕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팁(Tip)을 제공해 주십니다.
(엡4:21-24)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을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구습을 쫓고 욕심을 따르고 자신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삶으로 살아가는 육신적인 삶에서 신령한 영적인 삶으로 변화를 받아가야 비로소 욕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육은 결국 육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신앙으로 영혼을 성숙시켜 나가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욕심의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던 욕심쟁이 삭개오가 담대하게 욕심을 던져버리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삭개오가 누구입니까? 수전노처럼 돈을 갈취하고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러했던 그가 이처럼 놀랍게 변화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뽕나무에라도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 힘으로는 우리들의 욕심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으로 신령한 변화를 입으면 삭개오처럼 소중하던 것을 과감하게 내 던지며 주님의 제자로서의 멋들어진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봄이 깊어 4월 중순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들의 신령한 영적인 삶도 봄을 맞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들과 사랑하며 멋들어진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을 추하게 만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욕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욕심은 단순한 한 사람의 사람됨을 넘어 신앙적인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욕심이 사탄 마귀로부터 왔고 그러므로 죄를 만들며 결국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죽음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는 무서운 암적 존재이기에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리들의 과제인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도 이와 같은 욕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범죄에 연루 되었다가 비참하게 망한 사람들의 증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간이 그랬고 게하시가 또한 그랬으며 위대한 사사 삼손 또한 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성령 충만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욕심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귀한 말씀으로 그 해답을 얻어 우리 모두 이처럼 우리들의 영, 육간의 삶에 치명적인 암적 존재인 욕심의 문제를 해결 받고 봄 향기와 같은 아름다운 성도들로 거듭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4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