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9일 주일설교(관계개선이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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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9 April 201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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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개선이 축복입니다!
4. 19, 2015
本文:열왕기상2:1-9
說敎:崔 仁 根 牧 師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40년을 재임하고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을 마치면서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언의 일부분입니다. 그는 먼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형통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자기의 평생을 통하여 그에게 덕을 끼쳤던 사람과 해를 끼쳤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지에 대한 말로 유언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여기에서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의 일생을 두고 남겨 두고 싶은 사람이 세 사람인데 그 셋 중에 둘은 배신자들이고 하나만 은총을 끼쳤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평생을 통해 덕과 유익을 주는 사람보다는 고통과 해를 입힌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우연으로만 비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장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 중에 과연 우리는 어디에 해당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누군가에게 덕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해를 끼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잊어버리거나 무관심한 채 세상을 살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관계개선을 잘 하고 생을 깨끗이 마무리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기 전에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우리들에게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죽으면서도 잊지 못하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오늘 우리들도 한 번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잘못하였고 또 잘 하였으며 거기에 대한 삶의 결말은 어떻게 지어졌는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는 한 사람의 인관관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어 오고 오는 사람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제하의 주제를 걸고 새로운 새해 2015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관계개선이 없는 축복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에 관해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관계개선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형통한 삶을 결단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계개선이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참으로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로 꼬이고 힘들 때도 많지만 어떻게 하든지 관계개선만은 철저히 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작은 가슴의 분노나 눈앞에 작은 유익을 위해 경솔하게 관계를 파괴하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관계에 대해 누누이 여러 차례 말씀 해 주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다 한결 같이 불행하게 일이 벌어지기 전에 관계개선을 빨리하라는 뜻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는 서로 덕과 유익을 끼치는 일 보다는 서로 배신하고 원수가 되는 관계가 갑절이나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잘 배워서 지혜롭고 복된 인간관계를 통해서 삶이 보다 더 행복하고 유복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배신하지 말라!
인류의 모든 문학과 작품들은 한결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배신”입니다. 그리고 인간사를 뒤돌아보아도 인류의 흥망성쇠 또한 이처럼 사랑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는 평화가 깃들고 모든 일들이 형통하나 그 사랑이 변하여 배신이 되고 증오가 될 때에는 비극과 불행이 찾아오며 전쟁과 살인으로 피비린내가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생들이 살아가는 인간사요 인류의 역사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와중에서도 틀림없는 공통분모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배신의 결국은 엄청난 비국과 불행이라는 사실입니다. 단 한 건도 배신하고 그 삶의 결말이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처럼 뻔 한 결과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배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정리해 보면 이 또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유익을 위해 그렇게 무서운 삶의 결국을 알면서도 배신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산업사회를 이루고 있는 21세기입니다. 각 종 정보와 기술이 현대사회의 산업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 되는 사장과 회장의 심복으로 핵심 기술을 개발하여 큰돈을 벌던 사원이 그 기술을 빼돌려 자신의 사업을 만들거나 경쟁기업으로 들고 가서 배신하는 행위가 산업사회에서 가장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유익으로 끝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상대편에서 반드시 보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의 유익을 더 얻으려다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꼭 같은 배신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요압이요 또 다른 하나는 시므이입니다.
(왕상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요압이라는 사람은 다윗의 충복이었는데 다윗을 배신하고 다윗의 또 다른 충복을 그것도 둘씩이나 죽여 없애는 끔찍한 배신을 하였던 인물입니다. 다윗의 충복 아브넬과 아마사 장군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삼하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삼하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압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 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압살롬을 잃게 되자 참으로 비통해 했습니다. 어느 부모가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의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요압이 다윗에게 불충하게 됩니다.
(삼하19:5-7)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이 말은 감히 신하가 왕을 협박하고 멸시하는 아주 배은망덕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는 불충입니다. 다윗이 이 때에 이 요압으로부터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어 두었다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아들 솔로몬은 가차 없이 이와 같이 아버지요 부왕 다윗을 배신한 요압을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왕상2:29-31,34)
혹이 솔로몬왕에게 고하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가로되 너는 가서 저를 치라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저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고하여 가로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왕이 이르되 저의 말과 같이 하여 저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부친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신자의 말로였습니다. 전 생애를 통해 전무후무한 전적을 세우며 용맹과 빼어난 능력으로 백전백승하며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가 한 순간 잘못 판단하고 생각한 교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도 비참하게 죽어 거친 들에 묻히는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신자의 말로는 다 이렇게 되는 것임을 오늘 우리는 가슴에 새기며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배신자는 시므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상2:8-9)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시므이는 원래 사울 왕의 충복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다 오히려 자기가 죽고 그 자리에 다윗이 오르게 되자 반감을 품고 다윗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 다윗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다윗이 생애 가장 어려울 때 즉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도망가고 있을 때 시므이가 저주로 다윗을 고통스럽게 하였던 것입니다.
(삼하16:5-13)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도망갈 때의 그 비통함을 이 땅에 있는 그 누구라서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때에 시므이는 입에 담지 못할 저주로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다윗이 그것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까지 남겨 그를 심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든 솔로몬은 요압에 이어 시므이 또한 배신자에게 합당한 심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왕상2:44-46)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무릇 네 마음의 아는 모든 악 곧 내 부친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그러나 솔로몬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위는 영원히 여호와 앞에서 견고히 서리라 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하매 저가 나가서 시므이를 쳐서 죽게 한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리하여 두 배신자들이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자 말자 처단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최악의 배신자로 기록된 가룟 유다 또한 그 말로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행1:15-20)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배신자의 말로가 그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가장 중요한 인생의 말로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배신하지 않는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조건 없이 베푸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두 사람의 배신자들을 언급하면서 그가 또한 잊지 못하는 한 사람을 기억하며 그 선행을 사랑으로 갚으라고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길르앗 사람 바실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 다니는 초라한 다윗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다 내 놓았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바실래가 큰 사랑으로 돕지 않았으면 다윗은 굶어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삼하17:27-29)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이는 단순한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는 압살롬에게 알려 지는 날에는 몰사를 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바로 그 압살롬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래는 개의치 아니하고 다윗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죽는 그 순간에서도 그들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을 잊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그들의 후손들이 왕의 먹는 상에서 먹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어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상2:7)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군 다윗의 마음이었고 이는 또한 그를 가슴에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어떤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유익을 위해 스승도 하나님과 이웃도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소중한 목숨까지도 내어 놓고 이웃들에게 가장 값진 것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인색하며 배신하며 유익을 챙겨도 짧은 한 순간을 살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주고 나누어주며 사랑을 베풀며 값지게 살아도 또한 같은 제한된 삶을 살고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제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신적인 욕심과 삶을 청산하고 하늘나라에서 상급으로 기록되는 선한 역사를 위해 헌신하는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바실래와 같이 다윗과 같이 죽어도 오고 오는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고 있는 진정한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배신자를 심판하지 말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의아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왜 그 악한 배신자들을 스스로 처단하지 아니하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겨 해결하도록 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이는 원수 갚는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네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입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께서도 친히 실천하신 부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생각을 갖고 있을 때부터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사인으로 자신을 병정들에게 넘겨주는 파렴치한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향한 한결 같은 사랑을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마26:47-50)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그 악당들에게 잡히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말씀조차 그 배신자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신자는 그 스승을 팔고 얻었던 돈을 도로 갖다 반납하고 스스로 목을 매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들이 스스로 원수를 갚는다고 자신의 인생까지 함께 망치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다윗을 통해서 스스로 배신자를 처단하지 않았던 그 깊은 속뜻을 배우고 우리들이 배신자도 되지 말아야 되겠지만 행여 배신자를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그 배신자를 처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빚다가 이사 간 이웃이 바로 옆 아파트에 사는 것을 알고 찾아가 현관문 자물쇠에 접착제를 바른 5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진경찰서는 15일 이런 혐의(재물손괴)로 정모(57) 씨를 불구속 입건했다.정 씨는 지난 8일 오전 4시께 부산진구 박모(50)씨의 아파트 현관문 자물쇠에 강력 접착제를 마구 발라 문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 씨는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살던 박 씨가 2013년 10월 이사할 때까지 층간소음 문제로 자주 갈등을 빚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그러다가 정 씨는 최근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박 씨의 아내를 미행해 바로 옆 아파트로 이사한 사실을 알게 됐고 골탕을 먹이려고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박 씨의 신고로 아파트 폐쇄회로 TV를 분석해 정 씨를 붙잡았다.-조선일보기사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웃과의 관계개선부터 제대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들을 배신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이웃들을 선한 사랑으로 섬기고 돕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 때 왕을 지근에서 모시는 영광을 누렸던 사람들이 육신의 안목이 좁아 서슴없이 배신의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가 그 말로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끝나는 요압과 시므이를 보았습니다. 이는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는 동일하게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 인간 역사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바실래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정성과 사랑을 다해 돕는 멋들어진 모습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잊지를 못하는 그런 아름다운 선생을 오늘 우리들도 꼭 가슴으로 배워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이 꽃과 같아서 화려하게 피었는가 싶으면 어느 덧 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단순하게 어떤 사람을 돕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늘의 하나님께 인정과 상을 받게 되고 후손들이 축복을 누리게 되며 자신 또한 죽어도 영원히 남은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개선을 이룬 사람은 이처럼 아름다운 선행으로 자신의 삶을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받고 신선한 봄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으로 배신을 넘어 선생으로 승리하는 그런 멋들어진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4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관계개선이 축복입니다!
4. 19, 2015
本文:열왕기상2:1-9
說敎:崔 仁 根 牧 師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40년을 재임하고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을 마치면서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언의 일부분입니다. 그는 먼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형통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자기의 평생을 통하여 그에게 덕을 끼쳤던 사람과 해를 끼쳤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지에 대한 말로 유언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여기에서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의 일생을 두고 남겨 두고 싶은 사람이 세 사람인데 그 셋 중에 둘은 배신자들이고 하나만 은총을 끼쳤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평생을 통해 덕과 유익을 주는 사람보다는 고통과 해를 입힌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우연으로만 비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장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 중에 과연 우리는 어디에 해당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누군가에게 덕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해를 끼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잊어버리거나 무관심한 채 세상을 살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관계개선을 잘 하고 생을 깨끗이 마무리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기 전에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우리들에게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죽으면서도 잊지 못하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오늘 우리들도 한 번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잘못하였고 또 잘 하였으며 거기에 대한 삶의 결말은 어떻게 지어졌는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는 한 사람의 인관관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어 오고 오는 사람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제하의 주제를 걸고 새로운 새해 2015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관계개선이 없는 축복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에 관해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관계개선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형통한 삶을 결단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계개선이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참으로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로 꼬이고 힘들 때도 많지만 어떻게 하든지 관계개선만은 철저히 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작은 가슴의 분노나 눈앞에 작은 유익을 위해 경솔하게 관계를 파괴하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관계에 대해 누누이 여러 차례 말씀 해 주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다 한결 같이 불행하게 일이 벌어지기 전에 관계개선을 빨리하라는 뜻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는 서로 덕과 유익을 끼치는 일 보다는 서로 배신하고 원수가 되는 관계가 갑절이나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잘 배워서 지혜롭고 복된 인간관계를 통해서 삶이 보다 더 행복하고 유복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배신하지 말라!
인류의 모든 문학과 작품들은 한결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배신”입니다. 그리고 인간사를 뒤돌아보아도 인류의 흥망성쇠 또한 이처럼 사랑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는 평화가 깃들고 모든 일들이 형통하나 그 사랑이 변하여 배신이 되고 증오가 될 때에는 비극과 불행이 찾아오며 전쟁과 살인으로 피비린내가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생들이 살아가는 인간사요 인류의 역사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와중에서도 틀림없는 공통분모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배신의 결국은 엄청난 비국과 불행이라는 사실입니다. 단 한 건도 배신하고 그 삶의 결말이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처럼 뻔 한 결과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배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정리해 보면 이 또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유익을 위해 그렇게 무서운 삶의 결국을 알면서도 배신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산업사회를 이루고 있는 21세기입니다. 각 종 정보와 기술이 현대사회의 산업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 되는 사장과 회장의 심복으로 핵심 기술을 개발하여 큰돈을 벌던 사원이 그 기술을 빼돌려 자신의 사업을 만들거나 경쟁기업으로 들고 가서 배신하는 행위가 산업사회에서 가장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유익으로 끝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상대편에서 반드시 보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의 유익을 더 얻으려다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꼭 같은 배신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요압이요 또 다른 하나는 시므이입니다.
(왕상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요압이라는 사람은 다윗의 충복이었는데 다윗을 배신하고 다윗의 또 다른 충복을 그것도 둘씩이나 죽여 없애는 끔찍한 배신을 하였던 인물입니다. 다윗의 충복 아브넬과 아마사 장군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삼하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삼하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압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 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압살롬을 잃게 되자 참으로 비통해 했습니다. 어느 부모가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의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요압이 다윗에게 불충하게 됩니다.
(삼하19:5-7)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이 말은 감히 신하가 왕을 협박하고 멸시하는 아주 배은망덕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는 불충입니다. 다윗이 이 때에 이 요압으로부터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어 두었다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아들 솔로몬은 가차 없이 이와 같이 아버지요 부왕 다윗을 배신한 요압을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왕상2:29-31,34)
혹이 솔로몬왕에게 고하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가로되 너는 가서 저를 치라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저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고하여 가로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왕이 이르되 저의 말과 같이 하여 저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부친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신자의 말로였습니다. 전 생애를 통해 전무후무한 전적을 세우며 용맹과 빼어난 능력으로 백전백승하며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가 한 순간 잘못 판단하고 생각한 교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도 비참하게 죽어 거친 들에 묻히는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신자의 말로는 다 이렇게 되는 것임을 오늘 우리는 가슴에 새기며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배신자는 시므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상2:8-9)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시므이는 원래 사울 왕의 충복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다 오히려 자기가 죽고 그 자리에 다윗이 오르게 되자 반감을 품고 다윗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 다윗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다윗이 생애 가장 어려울 때 즉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도망가고 있을 때 시므이가 저주로 다윗을 고통스럽게 하였던 것입니다.
(삼하16:5-13)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도망갈 때의 그 비통함을 이 땅에 있는 그 누구라서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때에 시므이는 입에 담지 못할 저주로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다윗이 그것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까지 남겨 그를 심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든 솔로몬은 요압에 이어 시므이 또한 배신자에게 합당한 심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왕상2:44-46)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무릇 네 마음의 아는 모든 악 곧 내 부친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그러나 솔로몬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위는 영원히 여호와 앞에서 견고히 서리라 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하매 저가 나가서 시므이를 쳐서 죽게 한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리하여 두 배신자들이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자 말자 처단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최악의 배신자로 기록된 가룟 유다 또한 그 말로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행1:15-20)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배신자의 말로가 그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가장 중요한 인생의 말로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배신하지 않는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조건 없이 베푸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두 사람의 배신자들을 언급하면서 그가 또한 잊지 못하는 한 사람을 기억하며 그 선행을 사랑으로 갚으라고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길르앗 사람 바실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 다니는 초라한 다윗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다 내 놓았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바실래가 큰 사랑으로 돕지 않았으면 다윗은 굶어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삼하17:27-29)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이는 단순한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는 압살롬에게 알려 지는 날에는 몰사를 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바로 그 압살롬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래는 개의치 아니하고 다윗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죽는 그 순간에서도 그들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을 잊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그들의 후손들이 왕의 먹는 상에서 먹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어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상2:7)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군 다윗의 마음이었고 이는 또한 그를 가슴에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어떤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유익을 위해 스승도 하나님과 이웃도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소중한 목숨까지도 내어 놓고 이웃들에게 가장 값진 것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인색하며 배신하며 유익을 챙겨도 짧은 한 순간을 살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주고 나누어주며 사랑을 베풀며 값지게 살아도 또한 같은 제한된 삶을 살고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제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신적인 욕심과 삶을 청산하고 하늘나라에서 상급으로 기록되는 선한 역사를 위해 헌신하는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바실래와 같이 다윗과 같이 죽어도 오고 오는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고 있는 진정한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배신자를 심판하지 말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의아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왜 그 악한 배신자들을 스스로 처단하지 아니하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겨 해결하도록 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이는 원수 갚는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네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입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께서도 친히 실천하신 부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생각을 갖고 있을 때부터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사인으로 자신을 병정들에게 넘겨주는 파렴치한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향한 한결 같은 사랑을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마26:47-50)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그 악당들에게 잡히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말씀조차 그 배신자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신자는 그 스승을 팔고 얻었던 돈을 도로 갖다 반납하고 스스로 목을 매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들이 스스로 원수를 갚는다고 자신의 인생까지 함께 망치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다윗을 통해서 스스로 배신자를 처단하지 않았던 그 깊은 속뜻을 배우고 우리들이 배신자도 되지 말아야 되겠지만 행여 배신자를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그 배신자를 처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빚다가 이사 간 이웃이 바로 옆 아파트에 사는 것을 알고 찾아가 현관문 자물쇠에 접착제를 바른 5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진경찰서는 15일 이런 혐의(재물손괴)로 정모(57) 씨를 불구속 입건했다.정 씨는 지난 8일 오전 4시께 부산진구 박모(50)씨의 아파트 현관문 자물쇠에 강력 접착제를 마구 발라 문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 씨는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살던 박 씨가 2013년 10월 이사할 때까지 층간소음 문제로 자주 갈등을 빚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그러다가 정 씨는 최근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박 씨의 아내를 미행해 바로 옆 아파트로 이사한 사실을 알게 됐고 골탕을 먹이려고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박 씨의 신고로 아파트 폐쇄회로 TV를 분석해 정 씨를 붙잡았다.-조선일보기사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웃과의 관계개선부터 제대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들을 배신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이웃들을 선한 사랑으로 섬기고 돕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 때 왕을 지근에서 모시는 영광을 누렸던 사람들이 육신의 안목이 좁아 서슴없이 배신의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가 그 말로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끝나는 요압과 시므이를 보았습니다. 이는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는 동일하게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 인간 역사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바실래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정성과 사랑을 다해 돕는 멋들어진 모습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잊지를 못하는 그런 아름다운 선생을 오늘 우리들도 꼭 가슴으로 배워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이 꽃과 같아서 화려하게 피었는가 싶으면 어느 덧 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단순하게 어떤 사람을 돕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늘의 하나님께 인정과 상을 받게 되고 후손들이 축복을 누리게 되며 자신 또한 죽어도 영원히 남은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개선을 이룬 사람은 이처럼 아름다운 선행으로 자신의 삶을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받고 신선한 봄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으로 배신을 넘어 선생으로 승리하는 그런 멋들어진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4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