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1일 주일낮설교 (죽으면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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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1 June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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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살리라!
6. 11, 2017
本文:누가복음9:23-27
說敎:崔 仁 根 牧師
지난 6월 초 한국으로부터 참으로 가슴 아픈 뉴스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44살 의 젊은 청년이 14층 아파트에서 땅바닥으로 뛰어 내려 자살한 사건이 그것이었습니다. 김모씨로 알려진 그는 9살 때 미국 동부 코네티컷으로 입양이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입양자로서의 삶은 평탄치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절도, 알코올, 마약에까지 손을 대며 그렇게 정상적인 삶을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39살이 되기까지 양부모가 그의 신분을 해결해 주지 않아 불법체류자 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불체자로서 그와 같은 범법에 연류 되었던 그는 그만이야 한국으로 추방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한국말 또한 할 줄 몰라 완전히 이방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자신을 버렸던 부모님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낯설흔 고국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으나 가진 것도 없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에게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게 버티어 보기를 5년, 끝내 그는 한국에서 서바이벌하지 못한 체 자살로 44년 동안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는 것이 이렇게도 힘겹고 어려운 것은 결코 이와 같은 김씨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1년에 1만 5천명 이상이 자살하고 있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는 약물 과대복용으로만 작년 한 해 동안 6만 6천명이 죽었습니다. 우리들의 이민생활 역시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달 인영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한국에서 오신 김목사님의 사모님을 보고 “이곳으로 와서 같이 삽시다!”고 했더니 “싫어요, 여기는 밤낮으로 너무 일만 하는 것 같아요”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 잊었던 우리들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더 직시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죽어야 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가기가 이렇게도 힘들어서 자살을 하거나 마약을 하면서 고통을 잊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살리라!”고 하시니 선뜻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인 듯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한 마디 말씀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증거해 주시는 가장 소중한 근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2017년도를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내 걸고 열심히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의 진리와 참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삶 속에서 회복하고 따르면서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오늘 본문을 보면 매우 평범한 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비범하고 어려운 말씀으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9:23-2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세상에서 이 말씀보다 어렵고 힘 드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예수쟁이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 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똑바로 믿으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과연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 버릴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은 오늘 우리들이 결코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벅찬 요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버려야 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신을 부인하고 생명까지라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든지 아니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기가 삶의 중심이 되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든지 결국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와 같은 중차대한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공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따르든지 말든지 선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근본입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죽으면 살리라!”고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생명 있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죽음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단 하나밖에 없고 한 번 죽으면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죽음 앞에는 체면도, 지식도, 교양도, 명예도 다 소용이 없어지기 때입니다.
지난 5월 22일 평화롭게 음악회를 즐기고 있던 영국의 멘체스타극장에서 순식간에 폭탄이 터졌습니다. 22명이 죽고 60여 명이 다친 대형 사고였습니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젊잖게 도망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처절하게 도망을 갔습니다. 이렇듯 죽음 앞에서는 이성도 지성도 체면도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리지 살아야 한다는 단 하나의 본능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바로 우리들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점잖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을 부여잡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연약한 우리들을 굳세게 하시고 연약한 우리들을 도와주시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붙들어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믿고 이렇게 따르는 자들을 우리는 信者(신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어야 살리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단코 우리들의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신선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948년 루마니아의 공산정권하에서 투옥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는 너무나도 혹독한 고문이 두려워 손에 땀이 흥건히 고이도록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하고 오로지 성경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그때 성경 속에 365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매일 같이 하나님은 하루에 한 번씩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심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만 극복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우리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죽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으로 이와 같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가슴에 모신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지를 쓴 펄벅여사의 간증은 오늘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그 얼마나 소중한 믿음의 자산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펄벅여사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선교를 하는 선교사였습니다. 어느 해에는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 중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저 백인들 때문에 이 땅이 저주를 받아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한 사람들을 처리해야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펄벅여사의 어머니는 이와 같은 흉흉한 소문을 듣고 기도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장기 출타를 하여 계시지 않고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밤은 실로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악안 이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따뜻한 차와 빵을 구워 준비하고 그 악한 이들이 들이닥치면 당황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대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펄벅여사의 어머니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매일 밤 그렇게 준비를 하여 놓고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악당들이 쳐들어 올 때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든 악당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혼자서 그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지만 펄벅여사의 어머니는 밝은 미소로 침착하게 준비해 두었던 차와 빵을 내 놓고 그들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권하였습니다. 순간에 펼쳐진 모습에 허기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빵을 들고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먹다 보니 곤히 잠들어 있는 어린 아이들도 보이고 만면의 미소로 천사 같이 잔인한 자신들을 섬기는 여인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녹았고 배부른 그들은 계면쩍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 그토록 가물었던 땅에 흡족하게 비가 내려 더 이상의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으면 살리라!”고 말입니다. 죽음보다 더 두려움은 우리들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능력 많으신 우리 주님께 맡겨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생명인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펄벅여사의 어머니가 스스로 자신과 자녀들의 생명을 보존하겠다고 철통같은 방비를 하고 돈으로 중국 사람을 사서 경비를 세웠다면 결코 안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방비를 해도 그 많은 현지인들을 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들의 지혜와 방법으로 우리들의 소중한 것을 지키라고 하지 않으시고 주님께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육신이 죽어야 영혼이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육신적인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은 무엇인가에 눌리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이 고난을 통해 육신을 버리는 연단을 받았고 그로 인해 더 큰 유익을 얻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동일한 의미로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죽어야 살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육신이 죽어야 영혼이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지키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육신을 죽이고 신령한 영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과 같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대한민국의 여인네들은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는 그런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에 더 더욱 이 말씀은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문제인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호언장담한 것이 있었습니다. “위장전입을 한 사람은 결코 정부 각료에 세우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 각료를 세우려고 추천하여 국회에 인준을 받으려고 해 보니 하나 같이 위장전입의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정도로 부모가 자식을 위해 위장전임을 많이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육신적인 욕망을 버리고 죽으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 누구의 말이든지 간에 지킬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 예수님으로부터 바로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과연 육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까? 아니면 육신의 소욕을 얻고 누리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시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선택이요, 신앙생활도 선택인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을 직접 경험하시고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젊은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마19:16-23)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육신적인 포기가 없는 한 신령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육신적인 보화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단언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들이 육신적인 그것을 붙잡고 영적인 일을 포기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어야 살리라!”고 말입니다.
영국의 명문 캠브리지 대학의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도 공부에서도 수석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운동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의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캠퍼스 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장된 출세의 길, 그리고 돈과 명예 등, 그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선 그에게 누군가가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C. T. 스터드는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이것이 또한 헌신의 정신인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로 만족해서도 안 되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선교사로서의 일생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WEC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전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놀라운 일을 지금까지 계속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단독선교사 세 분도 모두 이 WEC선교단체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이 세상을 이렇게도 놀라웁게 바꾸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죽일 때 이처럼 위대한 일을 감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도였던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길어야 한 세기도 못살고 죽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자기 자신밖에 모른 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돈, 오로지 자신의 유익, 오로지 더 못 가져서 안달인 욕심에 젖어서 그렇게 소중한 세월을 다 보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은 빈 손 들고 떠나야 할 텐데도 말입니다. 어쩜 그렇게도 못 깨닫는지? 신기할 정도로 인생들은 한결 같이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죽어야 살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손수 죽어서 다시 사는 멋들어진 모습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2천 년이 지난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모으고 욕심 부리고 자기가 더 잘 났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자신 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며 소중한 재산을 나누는 그런 멋들어진 헌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훈훈한 사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기사입니다.
[배우 이영애의 계속된 선행에 많은 이들의 박수가 쏟아지고 있다. 올해 알려진 기부 액수만 무려 4억 5천만 원.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행보가 놀라울 따름이다. 이영애는 지난 6월 6일 한국장애인재단을 통해 주한 스리랑카대사관에 기부금 5만 달러(한화 5600만 원)을 전달했다. 특히 이는 스리랑카 홍수 피해자들을 위한 행보로, 국내 언론이 아닌 8일 스리랑카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한국장애인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기부는 스리랑카의 소식을 접한 이영애가 먼저 의사를 밝혀 진행된 사안이라고. 조용히 기부하기를 원한 이영애의 뜻에 따라 언론 보도를 하지 않았지만 결국 스리랑카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영애의 이러한 따뜻한 선행은 올해에만 벌써 4번째라 눈길을 끈다. 지난 3월 강릉 아산 병원에 1억 원을,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강원도 내 소외된 이웃을 위해 1억 5천만 원을 기부했으며, 3월과 4월에 각각 저소득층 산모를 위해 서울 제일병원에 1억 5천만 원을 쾌척했다. 이번 행보까지 합하면 대략 4억 5천만 원 정도의 액수를 총 5번, 단 3달 만에 기부하고 있는 셈. 이 밖에도 지난해까지 알려진 이영애의 선행은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는 재단을 통해서가 아닌 개인적인 선행도 많이 하는 편이라 알려지지 않은 기부금은 예측하기 힘들 정도라고. 이처럼 '한류스타'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선행으로 외모는 물론 마음도 아름다움을 증명하고 있는 이영애. 항상 꾸준한 모습으로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고 있는 그에게 많은 이들의 응원과 칭찬이 이어지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내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는 없어지는 것이기에 쉽게 할 수 없고 또한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사는 자들에게 엄청난 축복을 보장하시면서 친히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이기를 소원하는 오늘 우리들은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에 진정 감동을 받고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조금은 자신을 절제하며 사는 삶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명세기 기독교 국가라고 일컫는 미국이 그래도 소망이 있는 것은 백성들의 의식구조가 오늘 우리들과 조금은 다른 영적으로 개조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바로 이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미국인의 희생정신에 대한 해리스 조사(Harris Survey)는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식량부족인 나라를 돕기 위하여 기꺼이 하루를 굶겠다는 사람이 75%, 에너지 절약이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에너지 사용량의 10%를 삭감 할 용의가 있다는 사람이 78%, 외국의 농업을 지원하여 식량증산을 돕기 위하여 내 집 잔디밭의 치료비를 최소한으로 삭감하겠다는 사람이 87%등이었습니다. 이민자들로 뒤죽박죽이 된 것 같지만 그 내면에는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강력한 정신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 땅의 신앙으로 무장된 미국인들의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교회에만 다니는 단순한 종교인이 되지 말고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이웃을 돕고 섬길 수 있는 살아 있는 영혼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죽으면 살리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2017년도 현충의 달 6월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하게 목숨을 바친 선국 선혈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고 우리들의 죄를 해결해 주셨기에 오늘 우리들이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부모님들이 계셨고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오늘 우리들의 순서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웃들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들을 위해서 이제는 우리들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과감하게 죽고 영광스럽게 다시 살 수 있는 그 복된 길을 우리들도 쟁취해야 하겠습니다. 어영부영 하다가 저무는 태양처럼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도 서산에 기우는 때가 순식간에 찾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끊임 없이 가르쳐 주는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복된 순간에 죽어야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깨닫고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그리고 죽으면 썩어질 육신만을 위해 살지 않도록 무엇인가 이웃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하고 헌신하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회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복되고 귀한 6월 두 번째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과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6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