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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2일 주일낮설교 (하늘 아버지의 실상)

하늘 아버지의 실상

10. 22, 2017

本文:누가복음15:11-24

: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지난 919저는 경기도지사로서 1000만 명이 넘는 경기도민의 부름을 받고 선택됐다. 공인(公人)으로서의 역할을 흔들림 없이 하겠다.”라고 밝혔다. 장남이 필로폰 투약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사실이 알려진 이후 일각에서 나오는 사퇴설’, ‘책임론등을 일축한 것이다.

남 지사는 이날 오전 경기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사인(私人)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아들이 너무나 무거운 잘못을 저질렀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아버지로서 참담한 마음이다. 가슴이 아프다.”고도 했다.

남 지사는 앞으로의 모든 것은 아들 스스로 결정하고 헤쳐 나가고 이겨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전날 “(아버지인)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발언한 후 일각에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걸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남 지사는 또 아들과 통화를 못했는데 아들이 보고 싶다.”법과 절차에 따른 면회를 할 것이고 영장실질심사가 끝나는 오늘 오후 6시쯤 면회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고 했다.

이후 거취에 대해선 경기도지사로서 경기도정이 흔들림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일할 것.”이라며 나머지 정치적 문제에 대해선 차차 말씀드리겠다. 현재 정치 영역에 대해 말씀드릴 시기가 아니다.”고 했다.](조선일보 919일자)

이 기사를 읽으면서 같은 아버지로서 隔世之感(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잘 되는 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은 천만 명을 맡아 이끄는 경기 지사까지 되었는데 아들은 마약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으니 그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보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고 고백하며 사회에 죄인처럼 머리 숙여 사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똑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산 받을 재산을 미리 요구하기에 두 말 않고 내 주었는데 그것을 단 시간에 다 까먹어버리고 알거지가 되어 비참하게 돌아 왔으니 아버지로서 그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렇게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 온 못난 아들을 두고 아버지와 형이 대하는 자세를 보면서도 우리는 또 다시 아들과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바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기에 우리 하나님은 과연 우리들에게 어떠한 존재이시며 또한 아버지시인지 함께 배우며 감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실상

혹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철이 들어 아버지가 누구신지 이해하려면 60이 넘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그만큼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낳고 길러주시고 교육시켜 주신 육신의 아버지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우리가 감히 이해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까먹고 거지 탕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하는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체 버팅기고 불평하는 큰아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처럼 기분 좋은 아버지의 마음에 초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15:28-30)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것이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맏아들의 항변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육신의 아버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과 같은 비유를 통해서 하늘 아버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잘 배우고 익혀서 하늘 아버지를 똑바로 아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주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털어서 기약 없이 떠나버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사는지, 도무지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아주 먼 곳인데도 돌아오는 그 아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을까요?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아직도 먼 거리여서 다른 사람 같으면 그가 누군지조차 모를 것인데 아버지는 단방에 그가 아들임을 알아보고 달려 나가 맞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날마다 순간마다 동구 밖을 내다보며 아들이 돌아오나. 하고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게 기다리지 않았다면 먼 곳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 사람이 아들인지, 거지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일에 묻혀 곁에 와서 아버지하고 부를 때에야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야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날이면 날마다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집을 나간 그 아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하늘 아버지가 누구신지 배우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 가운데 있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때에는 친히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손을 잡아주시며 아들로 삼아주셨지만 이미 아들이 되었다가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난 자들은 다시 찾아 나서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탕자처럼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의 삶에 본문의 탕자처럼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오늘 본문의 탕자가 여전히 수중에 돈이 있고 모든 주변 여건이 그가 즐기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스스로 지탱하기 어려워졌을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그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며 배부르게 살아가는 종들까지도 부러운 대상이 되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그는 비로소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15:14-20)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탕자와 같이 마지막 순간까지 비참하게 되기 전에 따뜻한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 망가지고 다 잃어버리고 만신창이가 되어 더 이상의 소망이 없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도 뜨거운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면 탕자와 같은 놀라운 회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오늘도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들을 기다리며 동구 밖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다리심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조급하지 말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이유가 기다림이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건 없이 잘 대접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시면서 무자한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의 부인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긴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한없는 시간이 지나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는 점점 더 늙어만 갔으므로 아들을 가질 소망은 하루가 다르게 멀어져만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살같이 흘러 아브라함은 거의 100살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사라는 그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그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가지기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결국 나이 100살이 되어 더 이상의 소망이 없을 때, 바로 그때 약속하셨던 이삭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지 못한 아브라함이 첩을 통하여 낳은 자식 이스마엘은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이 땅에서 고통의 씨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요 바로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분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같이 길이 참고 기다리는 믿음으로 아들을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너무 급하다고 인스탄트 음식을 즐겨 먹으면 건강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이 급하다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자기 유익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그 결말이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재산은 생명 다음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도 아닌 아들이 그것을 다 까먹고 탕진하여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 기쁠 아버지가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런 아들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해 줄 아버지가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등장한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든 잘못을 불문에 붙이고 얼싸 안고 맞아 주시는 모습에서 깊은 감동과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잘못에 대해 깨끗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도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풍성함이 바로 우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잃어버린 재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돌아온 그 자체로 기쁨이 넘치고 용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돌에 새겨 기념으로 남겨 두어 지금도 그곳에 가면 가슴 찡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잃어버렸던 양을 찾아 그 양을 어깨에 메고 파안대소하고 서 계시는 동상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하나님의 사랑을 풍자하여 만들어 놓은 동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기초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돌아오면 그렇게도 기뻐하시며 우리들의 지난 모든 허물을 모르는 척 깨끗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하나님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기록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탕자의 형을 보면 꼭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사랑이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냉정한 비판만 그 가슴을 채우고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15: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들과 다른 아버지의 큰사랑인 것입니다. 푸근하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주고 품어주면 결국은 그것이 자신의 삶에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될 것인데도 우리는 그런 사랑을 품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참으로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따뜻한 사랑으로 용서하고 품어서 삭막한 사회를 풍성하게 한 아버지가 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모 상병은 휴가를 10여일 앞둔 지난달 926일 전투진지 공사 작업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인근 사격훈련장에서 날아온 유탄(流彈)을 맞고 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숨졌다. 사고 발생 직후 군은 "사격 훈련장에서 날아온 도비탄(跳飛彈)에 맞은 것으로 추정 된다."고 밝혔다. 도비탄은 딱딱한 물체에 부딪혀 튕겨 나온 총알이다. 하지만 국방부 조사 결과, 이 상병은 인근 사격 훈련장에서 날아온 유탄을 직접 맞고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상병의 아버지 이모(50)씨는 국방부 조사 결과에 대해 "(사격 훈련 도중) 빗나간 탄환을 어느 병사가 쐈는지 밝히거나 처벌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면서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총을 쏜 병사를 알게 되면 원망하게 될 것 같고, 병사 스스로나 그의 부모가 평생 자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다는 것이다. 이 상병 아버지는 "그 병사도 나처럼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떤 부모의 자식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언론을 통해 숨진 병사의 아버지 이씨의 입장을 접한 구본무 LG 회장은 "자식을 잃은 큰 슬픔 속에서도 사격훈련을 하다 사고를 낸 병사가 지니게 될 심적 타격과 군에 아들을 보낸 부모의 마음마저 헤아린 사려 깊은 뜻에 매우 감동받았다."며 위로금 1억 원을 전달하였다.](조선일보 1018일자)

참으로 우리는 두 아버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따뜻한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오늘 본문에서 이처럼 고귀한 용서의 모범을 친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아버지

평생을 고생하며 모아 두었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하고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탕자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시는 아버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변하지 않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시는 분은 오직 우리 하늘 아버지 밖에 없습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자신의 그렇게도 소중한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돼지나 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근근이 끼를 떼우며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형편을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지금 그 아버지가 하는 일에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몰골의 아들을 아버지는 맨발로 달려 나가 얼싸 안았습니다. 그리고 그 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자신의 반지를 빼어 그 아들에게 끼워주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깨끗이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라고 말입니다. 또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청하여 잔치를 배설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습니다. 잃었던 내 아들을 찾았으니 참으로 기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15: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는 말씀이 그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통 큰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은 이렇듯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재산을 탕진하였던, 그가 나가서 창기와 함께 놀아났던, 거지가 되어 돼지와 함께 살다가 돌아왔던, 아버지는 그런 구차한 모든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살아서 돌아온 그 아들만이 귀하고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큰아들을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까먹고 돌아온 동생이 얄밉기만 합니다. 그보다 그와 같은 아들을 심판하기는커녕 잔치까지 배설하고 기뻐하는 아버지가 더 미웠습니다. 가슴에는 그런 아버지와 동생을 향한 증오로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세상에서 거듭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늘 비판적이고 늘 비교하고 늘 못마땅한 마음에 사로잡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안타까운 군상들인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따뜻한 관용이나 용서나 사랑을 찾아 볼 수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완전하고 의롭고 모든 일을 다 잘 한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그런 초라한 모습들이 이 세상을 가득 매우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한 모습은 오늘 본문에 주인공인 아버지는 그런 아들까지도 따뜻한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달래고 가르치며 감싸 안는다는 사실입니다.

(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요 사랑이요 형언할 수 없이 크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그 하나님의 품안에서 꿈을 꾸고 내일을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그와 같은 풍성한 사랑은 끊임 없이 오늘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시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끝이 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실의 달 10월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이와 같은 시간 속에서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 해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배웠습니다. 끊임 없이 기다리고 인내하며 때를 사모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용서해 주고 따뜻한 가슴으로 망가진 사람들을 살려내는 그런 풍성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서로 죽이고 보복하며 스스로 의인인 채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어 보는 눈이 불안하고 듣는 귀가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푸근한 통 큰 사랑으로 품어 안고 살아가는 가슴 넉넉한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평생 모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지만 그래도 얼싸 안고 기꺼이 맞아 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두고도 가슴 뭉클한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까지도 원망하며 싫어하고 돌아서는 큰아들을 보면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숨길 수 없는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이 아버지와 같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만물이 풍성한 열매로 조물주를 기쁘시게 하는 이 복된 계절에 우리들의 믿음과 삶도 그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멋들어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1022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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