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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8일 주일낮설교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1. 28, 2018

本文:마태복음6:25-34

:

아더 랭크라는 영국의 실업가는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항상 불안했습니다. 많은 염려 가운데 살던 그는 염려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는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하고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가 생긴 날짜와 내용들을 적어 상자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매 수요일 날, 그는 상자 속의 메모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상자에 넣을 당시만 해도 큰 문젯거리였던 그것들이 훗날 다시 읽을 즈음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상자를 계속 활용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 살면서 크게 고민하며 염려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염려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이보다 훨씬 더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고 말입니다. 이는 도덕군자의 말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우이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우리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해결 방안을 찾되, 전전긍긍하며 염려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염려는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생겨나므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염려가 밀려올 때는 하나님, 염려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자꾸 염려하게 됩니다. 저의 염려의 목록들을 조목조목 아뢰오니 맡아 해결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내어 맡기면, 주님께서 그 염려들을 명쾌한 응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소중한 영적인 성도들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믿음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꼭집어 경고해 주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말하고 또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늘 현실이고 그곳에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생생한 현장학습 방식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가슴으로 말씀을 받고 행함으로 믿음을 만들어 주인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들의 삶에 신선한 변화와 축복을 만들어 내는 귀한 말씀으로 가슴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엄마를 잃은 어린 아이처럼 만 가지가 다 필요하고 모자라고 위험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우리들의 현실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면서 아무 것도 모르시는 척 명령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우리 자신들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뜻이 계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것을 함께 찾아보면서 영적인 사람이 되는 바른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염려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헛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86,400초를 허락 받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이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어느 순간 내 앞에서 멈추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죽었을 때입니다. 이렇게 보면 매 순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야 한다는 당연성과 시간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으로 말하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곧 죽어가고 있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것도 언제 멈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불안과 긴장 속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냉철한 인생일진데 그 소중한 시간들을 아무런 소용도 없는 염려와 걱정으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을 지켜보시는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생각인 것입니다. 언제 병이 들지, 언제 사고를 만나게 될지, 언제 심장이 멎고 이 세상을 떠나야 될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그 소중한 시간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다투고 미워하며 낭비하고 있는 우리들을 예수님을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우리들에게 부탁도 하시고 충고도 하시고 때로는 엄중하게 명령도 하시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염려와 걱정을 버리고 언제나 사고를 당할는지 알 수 없으니 늘 주님을 의지하고 언제 그 소중한 생명을 잃을지 모르니 영생을 취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와 같은 안타까운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고 감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참으로 아둔하고 어리석은 지혜자들인 것입니다.

지난 26일 대한민국 밀양에 있는 세종병원에서 불이나 37명이 사망하고 131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간호조무사도 사망하였으며 대부분 환자들이 변을 당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병을 고치겠다고 병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이처럼 비참하게 죽을 줄 알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연약한 우리 인생들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소중한 삶을 염려와 걱정으로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인생과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자세가 이방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입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생활소비품입니다. 그것이 없는데 염려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모자라는데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것들로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의 이 말씀에 공감하고 감동 받을 성도들이 과연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설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것들이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정확한 해답입니다. 아이를 낳은 부모라는 그 아이를 키울 방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 날 아이가 살든지 죽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애를 만들고 애를 낳는 그런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리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제 자식만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이고 마시우고 입히며 양육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남겨 두셨습니다.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우리들의 생활을 중심으로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시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은 끝까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외신들이 전해 온 예멘의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참담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5살 미만의 어린 소녀들을 결혼시키는 것이 큰 사회문제가 되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40%의 신부들이 15살 미만의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소연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하지만 부모들은 그들을 결혼식장으로 강제로 이끌어 간다고 합니다. 이유는 결혼 지참금을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돈은 미화로 천불 전후라고 합니다. 한 번은 7살 딸을 시집보냈는데 첫 날 밤에 과다 출혈과 장기손상으로 죽었습니다.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전 세계적으로 공분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이어진 예멘 내전으로 인해 지금까지 어린이 5000여 명이 숨지거나 다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니세프는 16(현지 시각) 성명을 통해 "20153월 본격화된 예멘 내전으로 하루 평균 5명의 아이가 죽거나 다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유니세프 발표에 따르면, 예멘 어린이 1100만 명이 피란, 질병, 빈곤, 영양 부족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 중 가장 극심한 피해는 '영양실조'입니다. 200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사투를 벌이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예멘 국민 대부분이 외부의 구호 식량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공급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병원과 같은 의료 서비스 시스템까지 무너지면서 영양실조 어린이의 상당수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릭셀 레라노 유니세프 예멘 대표는 성명을 통해 "예멘의 모든 어린이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전쟁으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유혈 사태를 종식하고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국제기구의 무조건적인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세계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요로운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배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잊은 채 스스로 돈을 벌어 스스로 잘 살 수 있다고 자만 할 때 하나님 없는 비참한 현실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 기갈이요 기근이기 때문입니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깊이 깨닫고 염려를 넘어 이방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내다보며 각성하고 돌아와 믿음의 세상을 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염려를 극복할 수가 없고 삶의 근본을 보장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친히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던 모습을 상상해 보신다면 왜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매라는 광야에서 60만 명을 친히 먹이시고 마시우시고 입히셨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믿음이 없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염려의 원인을 단도직입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6:28-30)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이 지배하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겨 두신 말씀의 시작을 이와 같이 근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근심과 믿음은 서로 함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근심이 물러가고 근심이 충만하면 믿음이 없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말세가 가까워 올수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것을 예언하시고 탄식하셨습니다.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근심 걱정이 충만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대에는 스트레스를 만병의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스트레는 모두가 다 내부적인 요인 즉 근심, 걱정, 두려움과 같은 요인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염려에 관한 긴 말씀을 마무리 하시면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명령을 남겨 두셨던 것입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의 염려하고 근심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 채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진 조건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이와 같은 조건들을 믿음이 있어야만 순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훈련하시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이런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이 한 마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단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의 모든 필요를 채워 줄 테니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그의 나라는 과연 무엇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하늘나라 곧 천국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는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늘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며 찾기만 하면 이 땅에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신자요, 이것을 기대해야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놀라운 천국과 하나님의 뜻을 기도로서 구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기도하되 모든 구하는 것들 보다 먼저 구라하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는 곧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훗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기도의 모델을 가르쳐 주셨는데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기도를 명령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6:33

(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치입니다. 아무리 미련하여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 두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우리는 교회에는 다니면서 이방인들과 똑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고 신자라고 자부하면서도 믿음 없는 책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딱 부러지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들이 날마다 염려하고 살아가는 생활의 모든 필요를 책임지고 채워주시겠노라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믿음인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터에서 형들도 이스라엘의 모든 용사들도 심지어는 나라의 왕까지도 두려워하는 골리앗 앞에 섰을 때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왜 심장이 두근거리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근심 걱정이 없었겠습니까? 전쟁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일 진데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현장에서 이런 열려가 없었다면 그것 순전히 거짓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 거대한 골리앗 앞에 나가 섰습니다. 무엇이 어린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도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친히 터득했던 경험이었고 확신이었습니다. 지난 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던 그 놀라운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 없는 당당함으로 골리앗 앞에 서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듯 자신을 걱정하는 사울 왕 앞에서 지난 날 자신의 체험을 소상하게 말씀드리고 그렇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담대하게 증거한 다음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상17:32-37)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확신이요 확신은 체험에서 오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은 그 어디에서 다윗과 같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생활 속에서 이와 같은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먹어야 할는지, 무엇을 마셔야 할는지, 또한 무엇을 입어야 할는지를 생활 속에서 고민하고 염려하다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해결 된다는 사실을 다윗과 같이 체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을 다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하게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하고 담대하

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버티고 서서 외치던 다윗과 같이 말입니다.

(삼상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는 다윗의 확신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의 그와 같은 믿음이 헛되지 않도록 사울 왕도 두려워 떨었던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대승리를 거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믿음으로 무장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어 이방인들이나 하는 그런 염려와 근심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당당하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다윗과 같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만 천하에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라!”는 표어를 내걸고 시작한 새해도 어느 덧 한 달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즘에 오늘 우리는 진정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이 무엇인지 생활 속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 근심을 물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금하시고 명령하신바 염려하지 않는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염려하는 이유가 또한 무엇인지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 진정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능력으로 승리하는 방안도 또한 찾아보았습니다. 염려는 아루런 유익도 없는 전혀 불필요한 불신의 소산물임을 깨닫고 그와 같은 초라한 모습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임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으로 무장하고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다윗처럼 일어나 승리하는 삶의 모습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염려하는 육신의 삶을 떠나 기도함으로 얻어지는 전화위복의 풍성함을 누리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귀하고 복된 1월 마지막 주일에도 변함없이 예배자로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몸과 마음과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풍성한 은총이 영육간에 넘쳐나게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128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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