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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8년 2월 4일 주일낮설교 (돈과 예수님)

2018년 2월 4일 주일낮설교 (돈과 예수님)

돈과 예수님

2. 4, 2018

本文:요한복음12:1-8

:

여전도회장님이 목사님을 찾아와 "목사님 다음 주일에 교인들에게 폐품을 가져와 달라고 광고해주세요. 그걸 팔아서 교회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먼저 떼어 바치는 것이지 폐품 팔아서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여전도회장을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하나님 일을 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서 그래요."라며 간곡하게 애원을 했습니다. 주일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광고했습니다. "집에 있는 빈 병이나 폐품이 있으면 전부 가져오십시오. 그것들을 팔아서 여전도회장님의 용돈을 좀 마련해 드립시다." 예배가 끝난 후 여전도회장이 길길이 날뛰면서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나를 거지로 아셨나요? 자존심 상해서 교회 못나오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정중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빈 병 팔아서 모은 돈으로 회장님이 쓰면 자존심 상하고, 하나님이 쓰면 괜찮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럼 자존심도 없는 분인 줄 알았습니까?" 그날 밤 여전도회장은 화가 안 풀려 씩씩거리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꿈에 천국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황금으로 지은 김 집사의 집, 진주 보석으로 지은 이 권사의 집 등 아름답고 화려한 집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기 집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집을 애타게 찾던 여전도회장은 동네가 거의 끝나는 한쪽 개울창 아랫동네에서 자신의 집을 발견했습니다. 기둥은 병 조각을 부셔서 세웠고, 벽은 휴지조각을 뜯어서 갖다 붙인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잠을 깬 여전도회장은 눈물로 회개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을 가장 중심자리에 높여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올 해의 우리 교회 표어는 영적인 사람이 되자!”입니다. 무엇이 영적인 사람입니까? 지난 주일 들은 말씀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 바로 영적인 삶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들이 가장 우선시 하는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존귀하게 여기고 그 하나님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모시는 생활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인 것입니다. 아무도 입에 담기를 원하지 않지만 우리는 너 나 할 것이 모두가 다 하나님보다 돈과 재물을 더 우선시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돈 때문에 인간관계도 깨어지고 하나님관계도 깨어지며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월을 맞아 그 첫 주일인 오늘은 이 돈과 예수님에 관해 성경이 증거 하는 대로 말씀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듣고 앞서 말씀 드린 어느 여전도회 회장과 같은 변화를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돈과 예수님

[지난 131일 부산시 부산진구 한 아파트.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던 아들을 깨우러 방에 들어갔던 어머니 A(52)씨는 소스라쳤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아들 B(21)군 옆에 13L(리터)짜리 헬륨가스통이 놓여 있었던 것. B군은 이미 숨져있었다. 현장에서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A씨는 아들이 가상화폐 투자를 했다가 최근 가치 급락으로 우울해했다.”“1년 전부터 병원에서 수면유도제를 처방받고 복용해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B군이 호흡장애로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숨지기 전날 오후 610분쯤 B군이 집 근처 잡화점에서 헬륨가스를 구입하는 장면이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 경찰 관계자는 시신에 별다른 외상이 없고, 주변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B군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과 주변에 따르면 B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2년 만에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서울의 한 명문대 공과대학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이 대학 동기 가운데 고교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한 것은 B군이 유일했다고 한다. 성격도 밝았다. 대학 동기 원모(22)씨는 장난을 많이 치는 밝은 친구로 그를 기억했다. 공대에 진학했지만 그는 연기를 하고 싶어 했다. 대학은 1년만 다니다가 휴학했고, 이때부터 연기학원에 다녔다. B군이 가상화폐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부모님께 받은 2000만원으로 시작했는데, 가상화폐 활황에 힘입어 한때 종자돈의 10(2억 원) 가까이 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B군은 가끔 대학동기들을 만날 때면 가상화폐로 돈을 벌었다고 자랑했다고 주변은 전했다. 그러나 올 초 정부가 가상화폐를 규제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자, 주요 가상화폐 가격이 일제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B군이 보유한 가상화폐도 마찬가지여서 2억 원에 달했던 가치가 어느덧 투자 밑천인 2000만원을 밑돌았다. 한 달여 전 그는 어머니 A씨에게 사람이 죽는다는 의미를 알겠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21일자 조선일보). 과연 돈은 무엇일까? 이 돈 때문에 아깝고 총명한 젊은 청년이 이렇게도 비명횡사한 사건을 조선일보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사화 해 놓고 있었습니다. 결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진데 만리 같은 인생을 앞에 둔 청년이 이렇게도 돈 때문에 충격을 받고 상실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돈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과연 예수님은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삶의 모든 가치기준을 예수님의 생각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다행히도 예수님께서 이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자세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그 말씀부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19:23-2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 세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돈에 대한 뭔가가 안개 속의 물체 같이 떠오르게 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아 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다소 생소한 말씀을 더해주셨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돈에 관한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에 도전을 받거나 감동을 받아서 이렇게 실천하고 순종하는 성도들은 거의 보지를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아직도 영적으로 변화 받지 못한 육신적인 삶의 단면입니다. 진정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면 절대로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제법 재산을 많이 가진 한 중소기업 사장이 불행하게도 말기 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생각해 잠겼습니다. 그 돈이 무엇이라고 그 돈을 벌려고 수많은 사람들과 원수가 되고 인간관계를 많이 망가뜨렸습니다. 그는 6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형선고를 받고 용기를 내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겸손히 사과하고 관계회복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만 남기고 모든 재산을 다 복지재단에 기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착실히 진행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은 그렇게 죽음에 임박했다는 자각증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찾아가 재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번의 진찰은 오진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너무나도 죄송하다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사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조금도 의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의사선생님의 손을 꼭 붙잡고 허리를 굽혀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때문에 제 인생이 새롭게 변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후회하지 않는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고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죽음 앞에서는 그렇게도 좇아갔던 재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 돈 때문에 우리들이 그 얼마나 구차하고 못나고 부끄럽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그의 아들과 같이 사랑하는 수제자 디모데에게 이 돈에 관한 말씀을 그토록 강력하게 전해 주었을까요? 다음에 소개해 드릴 말씀을 묵상해 본다면 과연 오늘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딤전6:9-10)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는 말씀과 같이 그는 아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돈 때문에 망가지고 비참해지는 일들이 그 얼마나 많았으면 이처럼 일만 악의 뿌리라고 까지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한다.”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으니 이 두 말씀은 동일한 의미로 만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만 악의 뿌리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돈을 열심히 벌고 값지게 쓰되 그 돈의 노예는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다다는 제법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그녀는 백치였고 벙어리였습니다. 아다다의 부모는 불쌍한 딸을 위해 논과 밭을 딸에게 얹어주며 시집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재산만 챙기고 불쌍한 아다다를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갈 곳 없던 아다다는 노총각 뱃사공 수룡이를 찾아갑니다. 짧지만 아다다는 수룡이의 품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수룡이도 역시 재산을 가지게 되자 그 돈으로 기생방이나 찾으며 아다다를 무시하였습니다. 비록 백치였으나 아다다는 그 돈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게 된다고 판단하고 수룡이 몰래 모든 돈을 바다에 갖다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수룡이가 자신을 찾아 행복하게 해 줄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돈을 잃어버린 수룡이는 거품을 물고 분노하다가 돈을 바다에 던져버린 아다다를 그 바다로 밀어 넣어 죽여 버리고 맙니다. 이 소설은 결국 돈 때문에 빚어지는 인간의 불행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 돈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놓쳐버린다면 그 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도 팔아 돈을 챙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전 재산을 쏟아 예수님을 섬기는 마리아와 그것을 바라보고 화를 내며 책망하는 가룟 유다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놀라는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관계인 가룟 유다가 왜 그렇게 마리아에게 화를 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도 비싼 향유를 쓸데없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어 낭비한다는 것 때문에 화를 냈던 것입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지 않고 허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가룟 유다의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사건을 기록한 저자 요한이 친히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2:4-6)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을 잘 관찰해 보면 가룟 유다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는 그 향유가 너무나도 아까운 것입니다. 그 엄청난 돈이 너무나도 탐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장소와 시간을 잘 못 잡았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 면전에서 가난한 자들을 들먹거리며 자신의 속내를 들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에게 전해 주셨던 것입니다.

(12:7-8)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육신에서 벗어나 영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생색내기식의 신앙생활을 벗어버려야 진실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가난한 자들을 운운하면서도 실상은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이웃을 비난하고 욕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은 그것이 비록 신앙생환에 관한 것이 아닐지라도 비겁하고 못난 처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자가 아닐지라도 이웃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너무나도 속보이게 감히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가난한 사람 운운하면서 예수님을 섬기는 마리아를 비난하고 있으니 진정 그는 못난 인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두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케어트의 작품에 [양면의 거울]이 있습니다. 여동생의 미모 때문에 연애에 실패한 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한 후에도 항상 자신의 얼굴을 동생과 비교하며 엄청난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남편 몰래 양학수술을 하고 미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엄청 실망하게 되고 끝내는 10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혼을 하고 맙니다. 남편은 그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마스크가 아니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 것은 당신을 덮고 있는 껍질의 모양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당신(Whole you)이었다. 그러한 당신의 얼굴에 칼을 댄 것은 이러한 나의 사랑과 신뢰에 칼을 댄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단지 부부관계에서만 존재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날 예수님과 우리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룰(Rule)입니다. 진실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관계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육신적인 삶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表裏不同(표리부동)한 삶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결한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룟 유다와 같이 온갖 美辭麗句(미사여구)로 잘난 척 하고 잘 믿는 척 하고 있지만 실상은 두 마음을 품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는 거짓 신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 이와 같은 못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도, 그를 친히 제자로 부르신 주님에게도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다음과 같은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하나님께 올려드린 마지막 기도의 일부분인데 그렇게도 중요한 기도에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해 언급하셨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멸망의 자식을 헬라 원문으로 보면 낭비하는 자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만 것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스스로 매고 죽은 비참한 인간으로 그 소중한 자신에게 주어진 그 값진 삶을 단 한 번도 진실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오로지 돈에 사로잡혀 끝끝내 진실된 삶으로 회복되지 못한 채 낭비하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사도 베드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1:15-18)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도 참혹한 표현이며 또한 기록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진실이 사라지게 되면 인간은 결국 이렇게도 돈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힘을 다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신자의 삶으로 회복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예수님을 섬긴 마리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사실 하나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막내 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전 재산을 다 쏟아 부어 섬기고 사랑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 자신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 주신 예수님을 모시고 특별한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예수님께 베풀어 드렸던 것입니다. 값은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향유가 한 근이나 되었습니다. 한 근은 요즘으로는 600g입니다. 그리고 그 값은 삼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남자 한 사람의 1년 연봉이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헌신은 실로 놀라운 가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역시 기독교는 체험적인 신앙이어야 힘이 있고 또한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오라비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무엇인들 그들이 아까와 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한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는 한없는 겸손이요 한없는 섬김이요, 한없는 복종을 뜻하는 행동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의 머리털은 여성의 정절과 순결을 뜻하며 더 나아가서는 여성의 존재 그 자체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를 풀고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고 하는 것은 그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의지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마리아의 그와 같은 헌신을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것이라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영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이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복음서 모든 책에 일일이 기록되고 있었고 예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까지 마리아의 이와 같은 헌신도 같이 전해 질 것이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와 같은 헌신과 사랑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이렇게까지 선언하셨겠습니까?

(26:12-13)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리아처럼 이렇게 온 마음과 재물을 다 쏟아 주님을 섬기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재물이 없고 재물이 있으면 마음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없이 사는 삼 남매의 삶이, 그것도 2천 년 전의 열악한 형편으로 비추어 볼 때 한 남자의 연봉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시라고 선언하셨고 그로 인해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고 없는 그런 세대에도 예수님을 섬긴 우리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흔적들을 기념하며 추모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니 온갖 욕심으로 덕지 앉은 우리 육신을 초월하여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라!”는 표어는 결코 하나의 구호로만 끝나서는 안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든 신자들의 삶의 가장 구체적인 열매이고 하나님의 바라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렇게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과 가룟 유다와 마리아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재물에 대한 가치관을 오늘 우리들도 가슴으로 숙지하고 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와 같이 돈에 사로잡혀 스승도 팔아먹는 그런 파렴치한 인생을 살지 않도록 거울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를 통해서 새로운 도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비록 작은 여자였지만 웬만한 남자들도 할 수 없는 위대하고 놀라운 헌신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무려 남자의 년 연봉을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고 머리를 풀어 헌신하는 모습은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행위로까지 인정해 주시고 복음과 함께 널리 그 선행을 전하도록 하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용기와 헌신이 진정 무엇인지 마리아는 이렇게도 아낌없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구호로만 외치지 말고 진정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서 마리와 같이 아낌없이 헌신하고 자손만대로 축복을 누리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도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와 2월 첫 주일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예수님의 풍성한 은총이 영육 간에 넘쳐나게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24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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