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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8년 2월 11일 주일낮설교 (비판하지 말라!)

2018년 2월 11일 주일낮설교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2. 11, 2018

本文:마태복음7:1-5

:

죄 지은 어느 수도자를 사제가 교회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바싸리온 압바라는 사제가 일어나서 그와 함께 나가면서 말했습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노 수도자 몇 사람이 포에멘 압바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기도 중에 조는 형제들을 보면 깨어 있게 꼬집어 줘야 합니까?” 그러자 포에멘 압바가 말했습니다. “내가 정작 어느 형제가 조는 것을 보게 되면, 내 무릎을 베고 쉬게 해 주겠습니다.”

한번은 쎄티스에서 어느 수도자가 죄를 지었습니다. 장상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모세 압바를 모셔 오도록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가 가장 죄와 먼 삶을 살아 왔고 죄인을 치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판단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제는 그에게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꼭 와 주십시오.”하고 재차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모세 압바는 떠날 채비를 하였습니다. 그는 구멍이 난 낡은 자루에다 모래를 가득 채워서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이게 뭡니까? 사부님.” 하고 묻자, 그는 내 죄가 내 뒤로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러 왔소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죄진 형제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잠바라 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말이 많으나 자신의 잘못은 요술쟁이가 구슬을 감추듯 감추기를 잘하며 남의 욕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말과 행동의 그릇된 점에는 눈을 밝히지만, 그러는 동안 그 자신은 발전이 없고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며 욕심만 부풀어 점점 나쁜 사람이 될 뿐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남을 비판하고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향하여 엄히 경고해 두고 계십니다.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이웃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못난 육신의 어리석은 모습이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깊은 깨달음과 변화의 결단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비판하지 말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정말 놀라는 것은 그렇게 비판하는 자신도 그와 같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완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자신도 자신이 비판하는 꼭 그와 같은 잘못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웃기는 일입니까? 그래서 자주 듣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는 결코 칭찬이나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육신적인 오만과 무지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이 세상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지극히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참으로 못난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세부터 고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설교하신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황금과 같이 우리들이 꼭 지켜야만 하는 소중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 받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의 이와 같은 황금률을 지키고 순종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도 강력하게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오늘 우리들이 이웃을 비판하지 않도록 변화를 받아야 하는 참된 길을 쫓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귀를 기울이고 진리의 말씀을 쫒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너무나도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참으로 담대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웃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세세한 것까지도 다 들추어내어 비판하고 순식간에 죄인을 만들어버립니다. 이러한 유능한 사람들로 인해 이 종은 우리교회 개척 초기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한 순간에 파렴치한 사기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학대학 문 앞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우리교회 목사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것이 그렇게도 유능한 자의 판단이었습니다. 목사도 아닌 것이 세례를 주었고 목사도 아닌 것이 결혼식 주례를 했으며 목사도 아닌 것이 장례식을 거행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니 교회가 발칵 뒤집힐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민국을 찾아가 가짜 목사로 영주권을 받았으니 당장에 추방하라고 고소를 하였습니다. 단 한 마디의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때 한국일보에서 조사장이 직접 전화를 해 와서 작금에 빌립보교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말과 일들이 진짜입니까? 기사를 다 써놓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반론의 기회를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35살의 피 끓는 열정과 성질만 남아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한 마디만 하고 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책임 질 수 있으면 기사를 한 번 내 보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기사는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 사장이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평생 기자 노릇하고 신문사 사장까지 되었는데 기사 내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강하게 나오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있다 싶어 끝내 신문에 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로 친해져서 오랜 세월 우리 지역사회에서 함께 잘 지내왔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 채 남을 판단하고 자기 자신은 가장 완전한 사람인 냥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신학교 문 앞에도 안 가본 가짜 목사라던 최목사는 지금까지 35년 동안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도 잘 나서 진짜 목사를 가짜 목사로 둔갑시켜 죽이려고 했던 그들은 지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라진 인물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완전하지 못하고 어느 부분에서든 잘못이 있고 비판 받아야 할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뽑아내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7:4-5)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잘 못할 수 있고 실수 할 수 있으며 그릇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 원죄로 인해 또 다를 죄를 범하며 그렇게 평생을 통해 죄의 종이 되어 살도록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비판하고 판단한 그 잘못을 바로 내가 또 하게 된다면 참으로 비참하고 부끄럽고 초라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다가 셀폰이 울리니까 엄청 짜증을 내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 성도님은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러졌습니다. 그런데 5분도 안 되어서 바로 그 목사님의 호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순간에 당황하신 그 목사님은 강대상 위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온 성도들이 와~ 하고 웃음보를 터트렸습니다. 가장 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연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2600여 년 전 진나라 사법관인 이리(李離)는 사건 기록을 들춰 보다가 거짓 보고로 무고한 이에게 사형을 판결해 죽게 한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는 부하에게 자신을 포박해 옥에 가둘 것을 명하고 자신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왕은 실무를 담당한 부하의 잘못이니 자책하지 말라며 이리를 만류했습니다. 이리는 "형벌을 잘못 판결하면 자신이 형벌을 받아야 하고, 사형을 오판하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왕께서 저를 사법관에 임명하신 것은 사람의 숨겨진 부분까지 가려내어 판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짓말을 믿고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칼에 엎드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귀감이 된 공직자를 소개한 사마천의 <사기> '순리열전(循吏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를 화두로 정진한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스님은 일제강점기 판사를 하다가 출가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평양에서 판사 생활을 하던 그는 1923년 처음으로 사형 선고를 내린 뒤 몇 날 며칠을 '내가 무슨 권리로 사형 판결을 할 수 있는가?'라는 번민에 휩싸였습니다. 법복을 팔아 가위와 엿판을 사서 3년 동안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금강산에 들어가 38세라는 나이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습니다. 진짜로 양심이 살아 있는 법관들은 이렇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위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에게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지난 25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1심에서는 5년을 선고하였고 2심 검사들은 지난 12월에 9년을 다시 구형하였습니다. 그러나 2심 재판관은 검사가 기소한 모두를 무혐의 처리하고 최순실의 딸에게 말을 사준 부분만 뇌물죄로 인정하여 26월에 4년의 집행유예로 석방했습니다. 왜 같은 법을 공부하고 같은 사명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 사람들이 이렇게도 서로 다른 판단을 내 놓았을까요? 누군가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를 오만하고 교만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엄청 교만하지 않고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자유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려면 이와 같은 육신의 오만을 벗어버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심판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라.”고 하시고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죄인 된 우리들이 어떻게 남을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판하지 말아야 비판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판단에 관해 남겨 두신 말씀 가운데 참으로 오늘 우리들을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이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또한 남으로부터 비판 받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들이 먼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은 애매하게 잘난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거야 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아마도 직접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에스더서의 내용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왕의 1인자였던 하만이 자신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르두개를 미워하다가 결국에는 그와 그가 속해 있는 유다인을 모조리 몰살할 계획을 세우고 왕에게 고하기를, “아주 작은 민족이 왕에게는 백해무익하면서 왕을 최고로 여기지 않는다.”는 등의 거짓으로 왕의 제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몰살 할 계략을 꾸몄던 것입니다. 이제는 적당한 날에 죽이기만 하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모르두개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에스더의 지혜와 믿음으로 결국에는 왕의 마음을 얻고 하만의 궤계가 만 천하에 들어남에 따라 91생으로 유다 민족들이 살아나고 원수 하만을 처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에스더서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르두개와 유다민족을 몰살하려고 계획을 꾸몄던 하만은 자신이 죽고 자신의 모든 가족들과 식솔들을 다 죽게 하는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판단 받지 않으려면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극명한 이유요 실제적인 모델입니다.

전북 익산의 한 사립고교 교사가 동료 교사 때문에 못 살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지난 22일 익산경찰서 등에 따르면 지난 1일 오전 1134분께 익산시 황등면 한 아파트 15층에서 A(53)교사가 투신해 숨졌습니다. 해당 아파트 경비원이 A교사를 발견하고 신고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A교사는 ‘000교사(동료 교사) 때문에 죽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A교사는 평소 “000교사가 괴롭혀서 많이 힘들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어린 나이도 아닌 53살이나 된 교사가 이처럼 비참하게 죽으면서 그 교사에 대한 유서까지 남겼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가해자는 어떻게 될까요?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남을 죽인 못된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피판 받지 않으려거든 너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항해사이며 아메리카의 발견자인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스페인에 귀환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어느 날 콜럼버스는 여러 귀족 부호들이 마련한 축하 잔치에 초대되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느 한 귀족이 비꼬아 말하기를, “누구라도 배를 타고 끈기 있게 항해만 하면 어떤 육지에라도 닿을 것이 뻔 한 일이 아니냐?” 하면서 콜럼버스의 업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비판하였습니다. 이 말에 콜럼버스는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한참이나 조용히 앉아 있더니 식탁에 올라온 삶은 계란 하나를 들고는 누구둔지 이 계란을 바로 세워 보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식탁에 놓여 있는 삶은 계란을 세워 보려 하였으나 세우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콜럼버스는 그러면 제가 해 보지요.” 하더니 삶은 계란의 한쪽을 테이블에 쳐서 깨뜨린 후 부서진 쪽을 아래로 하여 계란을 세웠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하면 못 세울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다시 말했습니다. “이렇듯 쉬운 일도 지금까지 누구 하나 하지를 못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이나 남이 해놓은 다음에는 쉬운 것이랍니다.” 라고 말하자 모두 시비를 그쳤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시민이 되려면 세상의 법을 따르고 지켜야 하며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칭찬 받고 복을 받는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상으로는 매우 분명하고 쉬운데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그것을 지키지 못함으로 법원을 들락거려야 하고 심지어는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는데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외식하는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하게 책망하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7:3-5)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일단 이웃을 판단할 자격이 없고 또한 이웃을 판단하게 되면 우리들도 똑 같이 판단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기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니 더는 판단하지 않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돈 벌러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소중한 재산을 갖다 바치라 시는 것도 아닌데, 오직 우리들의 인생살이가 더 평안하고 유익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방안으로 서로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라 하시는 것인데 안 지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씩 둘씩 바른 삶의 길을 지키고 따르다가 보면 좋은 사람도 되고 귀한 신자도 되는 것입니다.

서부개척시대였습니다. 지금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하려면 기차로 쉬지 않고 1주일을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서부 개척시대에는 30일에서 45일이 걸렸습니다. 서부에 살 길이 있고, 서부에 황금이 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부로 서부로 대 이동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이 2, 3일도 아니고 20-30일을 여행하느라고 몹시 피곤하고 지쳐있는데, 도중에 한 젊은 청년이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기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빽빽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달래지지 않습니다. 잠이나 자면서 쉬려고 했던 사람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은데 아이가 빽빽 울어대니까 화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사람들 가운데 한 성미가 급한 사람이 그 아이를 안고 있는 청년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여보시오! 아기를 데리고 다니려면 엄마가 데리고 다녀야지, 왜 남자가 데리고 다니면서 달래지도 못하는 거요?” 그러자, 그 청년이 일어서서 그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아이 때문에 피곤하신 여러분이 쉬지 못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 이 아이가 엄마를 따라다녀야 되지만... 제 아내가.... 어제 죽어서... 오늘... 고향으로 장사지내러 가는 길입니다. 화물칸에 제 아내의 시신을 싣고 가는 중인데...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겁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 그렇습니다. 울어대는 아이를 엄마가 아닌 아빠가 돌본다는 사실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피상적으로만 사건을 바라보며 사건의 내용은 보지 못 한 채 남을 쉽게 비난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판단하거나 비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판단은 내가 한다. 너희는 사랑만 해 주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18:24-3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폐일언하고 우리 주님께서 하지 말라 하시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 우리들에게 유익이 없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모두 이웃을 판단하는 일은 그만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니까,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웃을 판단할 만한 자격이 우리들에게 없으니까, 우리는 더 이상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육신을 넘어 영적으로 거듭나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하나씩 둘씩 육신적인 사고와 삶의 가치를 바꾸어 가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구호만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염려에서 해방 되어야 하겠고, 목숨처럼 귀한 돈이지만 예수님과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어리석은 삶을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매일 같이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하며 그것을 이야기 거리의 소제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게 판단하고 비판하는데 그 사람인들 우리를 좋게만 보고 좋게만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물고 물며 사니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엄히 명령하십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단순한 윤리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이것은 신앙생활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금하시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에 젖어 살 때의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늘 그렇게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 보다 훨씬 더 비판 받을 일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영적으로 거듭난 진짜 신자가 되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삶을 청산하고 좀 더 생산적이고 소망 찬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도 몸과 마음을 씻고 정성껏 하나님 전에 올라와 예배로 영광을 올려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안과 회복과 치유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21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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