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5일 주일낮설교 (원망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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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5 February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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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지 말라!
2. 25, 2018
本文:민수기16:41-50
說敎:崔 仁 根 牧師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의 특징은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과 자신의 여자를 싸잡아 원망하였습니다.
(창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인생들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원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소중한 축복을 상실하고 무서운 심판을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 말입니다. 이렇듯 원망은 타락한 인간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원망에서 떠나 “모든 것이 내 탓이오!”하면서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소위 그들은 선민이라는 특별한 칭송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그랬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은 또 다시 구별되어 레위 지파의 성전을 맡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을 지어 단체로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왜 너희 형제들이 다 해먹느냐? 너희가 우리들의 왕이냐?”하면서 대들었습니다.
(민16:1-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너희들 형제끼리 다 해먹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땅이 갈리지는 지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딸린 모든 가족들과 모든 재산들이 다 그렇게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민16:31-33)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입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것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서도 남은 백성들이 또 다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도전과 각성으로 신선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원망하지 말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250명을 만들었다면 이것은 엄청난 수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에게 속했던 모든 소유물이 함께 모이면 실로 엄청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이 서 있는 땅이 순식간에 벌어져 그 속으로 빠져들고 다시 땅이 입을 닫으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무서워 질겁을 하였으면서도 이틀이 지난 다음에 또 다시 몰려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데모를 하였다면 그것은 더욱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16:41-45)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회막을 바라본즉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앞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
그들은 이렇듯 거짓말처럼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반복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무려 14,700명이나 몰살을 당하는 재앙을 맞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타락하고 육신으로 변해버린 인간의 진면모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는 우매함, 설마 하나님이 우리들을 다 죽이시겠는가? 하는 불신, 지도자와 이웃에 대한 분노... 이런 것들이 타락한 인간의 본심이요 육신이 만들어 놓는 삶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원망은 이토록 무서운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는 날 동안 그치지 않고 원망하며 그토록 불행하고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이처럼 무서운 원망을 그치지 못하고 하나님은 또 그렇게 원망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와 원인을 찾아 육신을 넘어 영적으로 변화 받는 복된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화 시대에 세상 돌아가는 온갖 사실들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사실은 그 옛날 농경사회 때와 비교해 보면 엄청난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고 지구촌의 모든 소식들을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평창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누가 금을 땄는지? 거기에서 누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속속들이 다 듣고 또한 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생각해 보면 꼭 알아야 할 진짜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눈 속에는 들보를 두고 형제의 순 속의 티를 보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가 많은지? 자신이 얼마나 이웃을 헐뜯고 죽이고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속에 지식도 지혜도 메말라 가을 낙엽처럼 바스락거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웃을,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을, 스승을, 심지어는 하나님도 원망하고 나무라며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통탄하시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렘17:9-1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고 말입니다. 이렇듯 부패한 자신의 모습과 마음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패한 자신의 마음을 고치지 못한 채 이웃을 판단하고 원망하는 것은 語不成說(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대머리가 대머리 약을 판다면 그 누가 그런 약을 믿고 사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레위 자손들과 고라 자손들을 보면서 참으로 그들은 잘난 척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떼를 지어 의로운 척 하지만 그들의 우매함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무식이요 무지입니다.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를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지만 실제로 모세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모세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들 앞에 선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출4:10-14)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무엇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극구 사양하며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화를 내시면서까지 그를 보내셨고 결국 아론을 그의 수종자로 붙여 주시면서 까지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그들 앞에 서서 왕 노릇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원망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배후에는 우리들이 원망하는 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서 계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고라 자손들은 모세만 보고 아론만 보았지 그들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결국은 그렇게도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상왕이든 사람이든 원망하고 싶거든 꼭 그것만 보지 말고 그 상황과 그 사람을 세우신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고라 자손들과 같은 비참한 멸망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어서 우리들이 절대로 모르는 숨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처럼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오토바이를 사서 폼 잡고 다니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골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데 자꾸만 바람이 단추와 단추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추웠습니다. 그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옷을 뒤로 돌려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단추는 뒤로 가고 등 쪽이 앞으로 오니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좋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신이 나서 달리던 그는 커브 길에서 마주 오는 버스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었다가 그만 언덕 아래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뛰어 내려 가보니 청년은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목이 돌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우선 그 목을 똑바로 해 보려고 아무리 해도 목이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중에 힘이 센 한 사람이 나오더니 목을 홱 잡아 돌렸습니다. 갑자기 부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청년의 목이 그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은 병원으로 옮기기도 전에 죽고 만 것입니다. 단추 있는 곳이 뒤에 있고 머리는 앞으로 숙여져 있으니 그 사람의 목이 뒤틀린 줄 잘 못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지식의 한계입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돌려 입은 옷 하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목이 돌아간 줄 알고 끔찍한 사고를 만들어 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웃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웃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오래 전 The Day After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지구촌에 핵전쟁이 일어나 생명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죽어버리고 어떻게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만족했습니다. 모든 은행의 돈이 모두 자기 것이고 모든 딜러의 새 자동차가 또한 모두 자기 것이었습니다. 코스트코의 그 많은 물건들 또한 자기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였으면서도 결국은 그것들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맙니다. 바로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혼자 살도록 만드시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이웃은 우리들을 이 땅에서 생존하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소중한 이웃들을 하나님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을 원망하지 말고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배보다 더 소중하게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고 화평하기를 명하셨던 것입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렇듯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예배보다 더 이웃들과 화목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적입니다. 상대가 나를 칭찬하면 나도 상대를 칭찬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대가 나를 원망하면 나도 상대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원망하지 말고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렇게 서로 相扶相助(상부상조)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므로 불같이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행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내 영혼을 구하려는 노력과 내 이웃을 도우려는 노력도 하나입니다. 토인비는 말했습니다. “행복이란 남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고 말입니다. 행복은 선물처럼 모두 나눠 갖는 기쁨입니다. 미국 가요 가운데 “행복하고 싶어라. 그대를 행복하게 할 때 까지 난 행복할 수 없어라.”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남녀의 애정표현이지만 진리 같은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남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주여, 내게 밀알처럼 썩는 기쁨을 주시옵소서. 나룻배처럼 살게 하소서. 이름 없이 살게 하소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영적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원망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은 절대자를 우습게 여기고 경거망덕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하거나 무지한 탓이기도 합니다. 그 옛날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며 진주만 폭격을 감행했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맞고 단숨에 항복한 것만 보아도 무지함의 弊害(폐해)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이 미국을 향해 호언장담하며 핵무기게임을 하는 것도 똑 같은 맥락에서 단순무지한 소치임을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금요일인 23일 북한 제재를 위한 새로운 초강경 발표를 내 놓았습니다. 다음은 조선일보의 기사 일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현지 시각) 메릴랜드 주 옥슨힐에서 열리는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서 “오늘 나는 북한 정권에 대해 사상 최대의 제재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무부는 곧 북한의 제재 회피를 돕는 선박, 해운회사 및 무역회사 56개를 대상으로 북한 정권이 핵프로그램에 투자하고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과 연료의 근원을 차단하는 새로운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재무부는 이날 오후 석유 등 유엔 금지 물품을 밀수하는 북한 선박에 대한 해상차단을 대폭 강화하는 제재를 발표 할 전망이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앞서 1월 16일 한국전 유엔 참전국을 포함해 20개국 외교장관이 참석한 캐나다 밴쿠버 한반도 안보회의에서 “유엔 제재를 침해하는 북한 선박의 공해상 불법 환적을 막기 위해선 지구적 해상차단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차단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대북제재는 남북 간 대화를 늘리는 기조에도 불구하고, 대북 압박의 고삐는 늦추지 않을 것이란 트럼프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조선일보 2월 24일자)
불나방은 불에 뛰어 들면 죽는 줄도 모르고 불만 보면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조차도 불나방인 것입니다. 참으로 미련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들도 어리석기 짝이 없을 때가 있는데 하늘의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가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사람이 저렇게도 미련하고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결국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대적하다가 250명의 고라 자손들과 그 일당 및 그들에게 따른 모든 가족들과 재물이 몽땅 지진으로 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두려워 떨었으면서도 그것이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다시 또 대적을 하고 일어났으니 이 보다 더 무모한 짓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일상으로 도전 없이 하는 원망이 이렇게도 무서운 형벌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더는 원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이웃 원망으로 비참하게 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은 단순한 윤리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판의 대상이 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는 말씀은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담대하게 당을 짓고 떼를 지어 일어났다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망한 대표적인 모습들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그들의 우매한 멸망을 성경 그대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민16:31-35)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민16: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이 두 사건은 한결같이 미련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심판 받은 케이스로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경고로 삼아 고린도교인들을 훈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 사건을 거울삼아 이제 더 이상은 이웃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육신적인 처신을 그만 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가장 백해무익한 일이 이와 같은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와 신상생활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들과의 관계와 세상과 물질과의 관계가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것이 잘 못 되면 인생도 불행하게 되고 신앙생활도 망가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소중한 관계를 소리도 없이 깨드리는 것이 바로 원망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듣고 기뻐하거나 사랑 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 대해 입을 열면 칭찬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입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토록 해 온 일들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기도하며 훈련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으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육신의 그릇된 습관과 죄악을 고쳐가게 되면 마침내 영적인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날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옛말에 "안 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이 뭔가 안 되는 것 같으면 곧 바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합니다. 이러한 원망은 아담 때부터 있었습니다(창3:12). 그러므로 원망은 습관이며, 명백한 책임회피입니다. 그리고 원망의 말은 바로 자신을 향해 쏘는 화살입니다. 옛날에 작전을 아주 잘 세우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이 세우는 작전은 늘 화창한 날에만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날도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가 비가 오는 바람에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하늘을 욕하고 원망하면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 화살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렇듯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욕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빌2:14-16)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고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한지도 모릅니다. 어느 덧 두 달이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는 도토리처럼 육신의 껍질 속에 단단히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영적인 사람이 되어 디모데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신의 잔재를 하나씩 둘씩 벗어가야 만 합니다. 오늘은 원망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고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구별 받아 성전의 일을 맡을 정도로 쓰임 받으면서도 이웃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감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을 원망하다가 망한 고라 자손들은 영원히 우리들의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목도하고서도 깨닫지 못한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모르고 말씀에 무지하게 되면 그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우리 모두는 도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도와주고 살려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은 고사하고 심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서 깨달음이 있는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축복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를 위해 예배자로 구별되어 거룩한 성전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깊은 깨달음으로 원망을 넘어 사랑으로 무장하는 가장 복 받은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년 2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