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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8년 3월 11일 주일낮설교 (여호와를 경외하라!)

2018년 3월 11일 주일낮설교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라!

3. 11, 2018

本文:시편112:1-6

:

육신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변화를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육신적인 생각과 가치와 삶을 청산해야 됩니다. 그리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적으로 나아가는 길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기대하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을 기대하며 다윗과 같이 그 어떤 환경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이겨가야 합니다. 그와 같은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서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으로 보상하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조금은 생소하고 이 시대에 흔하게 사용하지 않는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경외라는 말입니다. 말이란 시대를 따라 변화하게 되고 때로는 死語(사어)가 되어 없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경외라는 말도 참으로 고상하고 좋은 말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뜻조차도 이해가기 어려운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래 경외”(敬畏)라는 말은 존경하며 두려워 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적으로는 이 보다 훨씬 더 강하고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의미를 함께 찾아보면서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마땅히 하나님을 향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의 진수를 나타낼 수 있도록 자세하게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잘 배워서 이 멋들어진 새 봄에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축복으로 행복한 영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오늘날 교회에서 이처럼 여화를 경외하라!”고 가르치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쯤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이런 용어자체가 생소하고 이처럼 비현실적인 용어로 제목조차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다니는데 하나님은 없고 성경은 읽는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제목은 영원히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관계를 맺지 않으면 영원히 남입니다. 구슬은 꿰어야 보석이 되고 사람은 관계를 맺어야 내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경외해야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가장 소중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귀를 세우고 들어야 하고 또한 배워야 합니다. 과연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성경에 기록하여 명시하고 축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함께 배워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마음 귀를 기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는 말씀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육신에서 해방 되어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악에서 멀어지고 거룩하여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안고 악에 빠져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기는커녕 만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복된 자라고 일컬으시며 각양 귀한 축복으로 보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길은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에서 떠나고 악을 미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친히 하늘의 하나님께서 명령 하시는 바 여호와를 경외하는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살전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악은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도두는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는 말씀을 가슴으로 품고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인간의 내면은 사실상 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선한 척 하는 것은 거짓되고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스스로의 선은 곧 악인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질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다시 한 번 깨닫고 이와 같은 악에서 탈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7:21-24)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애틀 주변의 고속도로는 제한 속도가 60마일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잠겨 운전하다가 보면 70-80으로 달릴 때가 있습니다. 깜짝 놀라 백미러를 보면 뒤에 폴리스가 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장이 뛰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를 개척하고 2년도 안 되었을 때 그땐 브라이어가 매우 촌이었습니다. 옆에는 공동묘지도 있고 아직 많은 인가가 들어서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집사님 한 분이 아파서 직장을 못 갔다고 하기에 심방을 갔다 오다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골길이기에 스탑 사인(Stop Sign)에서 풀 스탑(Full Stop)을 하지 아니하고 턴(Turn)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폴리스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순진한 이 종은 그냥 지나쳐 가야 하는데 스스로 갓길(Shoulder)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폴리스도 차를 세우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탑 사인에서 풀 스탑을 하지 않았다고 했더니 , 그러면 티켓을 받아야 한다.”면서 티켓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자의 작아진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면 바보스럽지만 그때 그 티켓은 저의 평생 운전을 하면서 스탑 사인에서 풀 스탑 하는 좋은 경고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래곤 유진에서 연수 온 교수 부인 7명이 벤을 타고 놀러가다가 스탑 사인을 못 본체 길을 지나다가 대형트럭에 부딛혀 전원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기에 더욱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완전 운전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폴리스를 두려워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 모두는 예외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죄를 가장 미워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악을 제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한 실례가 출애굽기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1: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추상같은 왕의 명령보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여 왕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좇았던 산파 때문에 모세는 태어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는 간단한 한 시대의 한 위대한 신앙인이었구나 하고 말지만 그 배후를 생각해 보면 그 산파는 한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놀라운 사명을 감당한 것이 됩니다. 만약 그때 그 산파들이 하나님보다 왕을 더 두려워하여 모세를 죽여 버렸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순간의 판단이 역사를 바꾸어 놓고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우리들의 자녀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적인 결단이 한 순간의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이 실로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순종하는 깊은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으로 상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실제 인물을 바로를 세우시고 오고 오는 세대에 교훈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무려 열 가지나 보여주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자가 죽어나가는 무서운 재앙 앞에서는 잠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 내어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 어떻게 하였습니까? 모든 군사를 풀어 다시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는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왕에게 군사는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거늘 그는 그만 그 소중한 자식들을 홍해에 몽땅 장사하고 말았습니다.

(14:27-28)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까?”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가슴을 덮고 있는 죄악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를 덮어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구름에 가리워 태양이 보이지 않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짙은 구름이 가득하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 내려도 구름 위에는 태양이 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한 마디 말씀조차 하지 않으셔도 우리들의 등 뒤에는 하나님께서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부끄럽고 무서워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자니 오늘 우리들이 육신을 넘어 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이 가장 아름답고 축복 받을 만한 삶은 섬기는 삶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고 말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 얼마나 황홀하고 멋있겠습니까? 그 길이 바로 섬기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섬기는 삶을 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온 몸으로 또한 모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10: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가 섬김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을 더 좋아합니까? 백이면 백 모두 다 섬김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면 섬기는 삶으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바드 대학의 유명한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박사는 예수님을 제대로 영접하고 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좋은 연봉과 명예와 인기를 한 순간에 다 내려놓고 케나다의 조용한 시골에서 정신박약아를 섬기는 길로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귀히 여기시고 하바드에서의 명성보다 더 높게 그리고 그때의 삶보다 더 보람 있고 기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몸으로 예배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불쌍한 이웃들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육신의 일을 신령한 영적인 예배로까지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렇게 섬기는 이방인을 선택하시고 스스로 잘 난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신적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가 바로 그 실례입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어서 당대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은 서로 상종조차 못하도록 법으로 묶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조차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도에 묶여 있었던 이방인 고넬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그의 섬김의 모습이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0:1-4)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100이란 군사를 거느린 군대의 지도자였지만 시골의 농부처럼 포근한 가슴으로 이웃을 섬겼습니다. 그는 온 가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인도하였으며 아웃들을 많이 구제하였고 끊임없이 항상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가정에 복을 베풀어 주시고 그렇게도 듣고 싶던 말씀을 유대인인보다 훨씬 더 유대인인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친히 보내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셨으며 성령님을 친히 보내시고 그의 온 가족들이 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기적 같은 역사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10:44-48)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당대에 기적이었으며 천지개벽과 같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섬기며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겨야 합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적인 선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영적으로 거듭나 얼마나 헌신적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느냐로 하나님은 우리들의 신앙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잘난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고 섬기는 겸손한 자는 섬김을 받는 높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20: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이 이렇듯 세상에서 큰 자가 되어 섬김을 받는 교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크게 만들어 주는 그런 복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김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축복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생생한 증거입니다.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들이 오늘날 가장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축복이니 자손이 잘 되고 부요와 재물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고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함입니다. 불행하게도 타락한 인생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몽땅 다 육신으로 돌변하여 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악을 벗어버리고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바쳐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자들을 복이 있는 자로 인정하시고 말할 수 없는 풍성한 은총과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시면 영원히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친히 복이 있는 자라고 인정하시는 그런 복된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길은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앉으나 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니 육신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영적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거듭나려니 여호와의 말씀을 크게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귀한 날 하나님 집에 올라와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며 영적으로 거듭나기 위해 신령한 예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충성한 축복이 차고 넘치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31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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