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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일 주일낮설교 (소망을 이루어라!)

소망을 이루어라!

7. 1, 2018

本文:로마서5:1-4

: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 종은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자신의 꿈을 고백하게 하고 그 꿈을 스스로 이루어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간에 한국에서 온 친구 김학기 목사님과 같이 터코마에서 살고 있는 박윤식 목사님 가족들의 초청으로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예지, 상준, 예인이와 함께 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을 때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상준이가 벌써 청년이 되어 이번 9월에 UW에 공부하러 온다는 소리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장래 네 소망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엔드류 선생님과 같이 변호사가 되겠습니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가슴이 뿌듯하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최의룡변호사가 롤 모델이었다고 하면서 그와 같은 선생님을 따라 자신도 로스쿨에 가고 장차 변화사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고 청년들이 야무진 소망을 품고 순간마가 기도를 받으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보기만 하여도 든든하고 기대가 가는 귀한 청년들입니다. 하지만 꿈은 꾼다고만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장애도 많고 견제도 많으며 넘어야 할 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이 꿈을 이루는 방법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소망 성취에 관한 진리를 가슴으로 받고 우리 모두가 다 가슴에 품은 꿈과 소망을 하나씩 둘씩 이루어 가는 벅찬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소망을 이루어라!

 

이 시대에 가장 큰 불행은 젊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의 가슴에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진학을 하였는데도 아직 무엇을 전공으로 선택해야 할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주변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에 끝내야 하는 전공을 수시로 바꾸며 졸업을 늦추고 있는 현실 또한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공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꿈에 대한 생각들을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신의학자 A. H. Maslow - 소망은 인간의 가치관을 좌우한다.

신학자 Paul Tillich - 소망은 인간에게 살아야 할 의미를 제공한다.

현대철학가 Huson Smith -소망은 만족한 생활의 기본적인 구조다.

이렇듯 소망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제오후 4시에도 한국 울산에서 46살의 소방공무원이 울산대교에서 바다로 뛰어 내려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밤낮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소방공무원인 그는 왜 그렇게 허망하게 생명을 버렸을까요? 삶에 의미와 소망이 없다면 다 그렇게 허망하게 자살이라는 최악의 길을 선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반듯한 소망을 안고 비록 힘든 세상일지라도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은 두고 가야 할 허무한 것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진정한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참된 소망을 품은 자라면 그 어떤 시련과 고통이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로 끝까지 성취하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소망을 이루는 세 단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다 이와 같은 과정을 잘 뛰어 넘어 진정한 소망을 이루며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의 과정을 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환난은 곧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이라는 놀라운 것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고통이라는 특수한 것을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문자 그대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악합니다.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습니다. 남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섞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꿈을 실현하며 소망의 내일을 기대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렇잖아도 허덕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버지 대라와 함께 우상장사를 하며 대사 없이 살아가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부모와 친척과 본토를 떠나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심층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그 모든 과정이 고통바로 그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 때에 이렇게 부모와 본토를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양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빼앗겨야만 하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가 없었다면 그는 아리따운 아내를 타국에서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조카 롯과 헤어져야만 하였습니다. 외롭고 힘든 이민생활 속에서 유일한 핏줄이었고 위로가 되었던 롯과의 이별은 그야말로 늙어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는 더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이 백 살에 기적 같이 얻었던 아들 이삭을 번제로 태워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 아들마저도 바쳐드려야만 했던 처참한 고통의 늪에 빠져야만 했었습니다. 소망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이 당해야만 했던 고통이 바로 이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소망을 이루는 길은 이렇듯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던 것입니다.

옛날 요단 계곡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 나무는 각기 갖고 있는 꿈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첫째 나무는 "나의 꿈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되는 것이야. 그렇게 되면 평생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을 테니까." 둘째 나무는 "나는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 나의 몸으로 큰 배를 만들어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 말이야." 셋째 나무는 "나는 크고 굵게 자라서 지나가는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늘을 제공하고 싶어." 얼마 후 세 그루의 나무는 이름 모를 도끼에 의해 잘려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성전의 제단이 된 것이 아니라 어느 집의 냄새나는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아니라 갈릴리 호숫가에 머무는 작은 고깃배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십자가 형틀로 만들어 졌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들은 그들의 짧은 생각 끝에 그들의 생이 무의미하며 실패 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심한 좌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에, 첫째 나무는 심히 냄새나고 누추한 말구유가 되었으나 어느 날 밤 가장 거룩한 성스러운 아기 예수님이 눕혀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갈릴리 호숫가의 조그만 고깃배가 되었으나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어떤 큰 배보다 더 큰 명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나무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가 되어 그 후 영원한 믿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단 계곡에 서 있던 세 그루의 나무들은 한때 자신들의 꿈이 좌절되는 듯한 고통을 겪었으나, 그 고통 이후에 참으로 영광이 넘치는 기쁨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이후에 반드시 그 이상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실패와 고통을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바라볼 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인내의 과정도 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환난을 통해 더욱 단단해 지는 인내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환난을 무섭게 이겨낸 단 한 사람을 들라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욥을 들 것입니다. 그는 한 순간에 아들 일곱과 딸 셋, 그리고 당대에 가장 부자로 살았던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몸마저도 병들어 누워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와 같은 모든 고통과 환난을 이겨낸 욥을 인내의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욥이 어떻게 인내의 사람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듣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처럼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하나님의 더 없는 놀라운 축복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역시 그 엄청난 환난과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싸워 이겨내고 오늘 우리들이 아는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모든 환경을 참아내고 견뎌내고 싸워내며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지 않고 이루어 낼 수 있는 승리는 없습니다. 모든 역사와 승리의 배후에는 길이 참고 견뎌내는 인내가 있었음을 우리는 우리들의 경험과 역사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참아내는 인내의 사람들을 욥과 같이 귀하게 여시시고 축복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링컨이라는 사람은 인내심이 뛰어나게 강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어떤 사건의 변호 의뢰를 받고 법정에 나가 보니, 당시 유명한 변호사이던 스탠튼이라는 사람이 같은 변론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교만한 스탠튼은 법정에서 링컨을 가리키며, 저런 시골뜨기 변호사와 나를 한 자리에서 변호하라고 하는 것은 내게 대한 모욕이라고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망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링컨도 사람인데 분한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단 한 마디의 반박도, 대꾸도 없이 묵묵히 서서 그 모욕을 참아냈습니다. 그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인내심은 확실한 소망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생기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인내심으로 이어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사도 바울은 힘 있게 부르짖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고난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우리는 오늘 이 괴로움을 이기고 살아갑니다.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주님과 함께 길이 살 것을 믿고, 인내의 아름다움으로 일관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이와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인내로 승리할 수 있도록 연단 받고 훈련 받기를 기대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축복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연단의 과정을 넘어야 합니다

연단은 잘 달련되는 것을 말합니다. “비 온 후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을 참아내고 견디면 굳어진 땅과 같이 잘 달련된 날이 썬 칼과 같이 믿음의 사람, 성공하는 사람, 소망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참아내고 견디며 결국에는 기적 같이 아들을 얻었고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아 이 땅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감명을 받았고 그의 영적인 삶을 좋은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인내와 연단을 친히 기록으로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4:18-20)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숱한 환난을 인내로 이겨내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서 꿈에도 그리던 소망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소망의 항구를 향해 달려가는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과연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소망을 우리는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불행하게도 꿈은 야무진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기는 꺼려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꿈은 꿈으로만 남고 현실은 늘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고향과 본토와 아비와 친척들을 떠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럭저럭 남들이 살았던 것처럼 살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순종하여 소망을 품고 비록 고통과 시련이 넘쳐나는 새 인생이었지만 그 소망의 길을 쫓았기에 그가 떠난 4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살아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하늘의 소망을 가슴으로 품고 비록 아브라함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끝까지 견디며 단단해지는 연단의 종들이 되어 후손들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그런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망을 품고 사는 길이요 또한 그 소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날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아브라함과 사도 바울 같은 진정한 소망을 이루는 하나님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87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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