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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攝理(섭리) (2024년 7월 28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攝理(섭리)

7. 28, 2024

:창세기45:1-8

說敎:崔仁牧師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다음 그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시고 보존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Providence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조차도 이와 같은 말이 있는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창세기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요셉의 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잡아 죽이려고 하다가 간신히 살려 애굽으로 팔아버릴 정도로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꾼 꿈이 어떻게 되나 한 번 보자고까지 하였습니다.

(37:18-20)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새로운 민족으로 성장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비전을 미리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먼 미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은 자연재해로 닥칠 큰 흉년을 대비하도록 요셉을 통해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만 살아가던 요셉의 형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와 같은 요셉을 죽이고 요셉이 장담하듯 말한 꿈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37:5-9)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단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거듭된 꿈으로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수련의 달 7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오묘한 진리를 요셉을 통해서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귀를 여시고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45:4-5)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진정한 신앙인은 눈앞에 있는 환경이나 사람을 보지 말고 그 환경과 사람의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 헤롯이라는 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악한 자였습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지적하자 그는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결국은 그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 세례 요한을 보내신 분이 하늘의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악한 헤롯을 벌레가 먹어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똑 같은 케이스가 성경에 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경우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신하의 아내를 취한 다윗을 직격하며 그것은 큰 범죄라고 지적하자 다윗은 그 나단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굴복하였습니다. 똑 같은 케이스인데도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는 이렇게도 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다윗은 더 큰 왕으로 들어 쓰시고 헤롯은 죽였던 것입니다.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건들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서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장본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뜻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요셉이요 요셉의 형들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비전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전을 당당하게 부모형제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37:5-9)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요셉에게만 비전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같이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비전을 주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 달란트 받았던 자와 같이 그것을 땅에 묻어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당당하게 오픈하여 또 다른 열매를 맺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비전을 주실 때 우리는 요셉과 같이 그것을 오픈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비전에 공감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형들은 영적으로 닫혀 있는 사람들이라 그와 같은 비전을 오히려 미워하는 조건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은 요셉이 받은 비전과 같이 요셉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래 나온 성도들은 이 종이 입버릇처럼 외친 비전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종은 30대부터 노인아파트를 지어 미국에서 나그네처럼 외롭게 여생을 보내시는 어른들을 섬기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그래서 공원묘지를 구입하고 몬로에 큰 땅을 사서 정원교회와 밭을 일구며 한인 어르신들이 말년에 함께 인생을 공유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효도관광으로 이스라엘 성시순례를 비롯하여 하와이, 캐나다, 옐로스톤, 심지어 라스베가스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비전프로잭트를 주셨습니다. 꿈은 이렇듯 오픈하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비전을 이루시기 원하시며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39:19-20)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요셉은 결국 애굽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이라고 하는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체색 옷만 입고 왕자와 같이 살아가던 요셉이 한 순간에 먼 남의 나라 남의 집에서 종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 것인지 타국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는 너무나도 잘 이해합니다. 종에게는 인격이 없습니다. 종에게는 자유도 없습니다. 종은 그냥 주인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주인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자신의 도구와 같이 이용하고 희롱하려고 하였겠습니까? 요셉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그와 같은 여주인의 손아귀에서 도망가자 여주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요셉을 남편에게 더러운 죄인으로 고발하고 그렇게도 잘 해주었던 보디발이었지만 자기 아내의 말만 듣고 한 순간에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요셉은 그렇게도 보고 싶고 그리운 아버지도 보지 못한 채 형들에게 버림받아 남의 집의 종살이를 하다가 한 순간에 파렴치한 범인이 되어 감옥에까지 들어갔으니 그 비참함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분노하거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나 인생이 다 끝났다고 절망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하고 외로운 그 모든 고통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원대한 목적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믿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인 것입니다.

요셉은 잔인하게 자신을 죽이려 하였던 모든 이들을 용서하였습니다

(50:15-21)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의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마침내 요셉은 성공하였습니다. 감옥에서 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갔다가 당한 고난의 늪에서 무려 13년이란 세월을 보낸 다음 요셉은 이렇게도 놀랍게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일찌감치 요셉을 점찍으시고 연단하신 다음 이렇게도 크고 장하게 세우신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보통 육신적인 사람 같으면 자신의 이렇게도 높아진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그토록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고 팔아먹으며 고통을 주었던 보디발의 아내나 형님들을 가차 없이 불러 심판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그 누구라도 하는 그런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악한 형님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신을 고등의 늪으로 팔아 버린 형님들을 보지 않고 그 형님들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들은 바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눈앞에 있는 환경이나 사람만 보는 것은 소인배 적이고 육신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환경이나 사람을 보지 않고 그 뒤에 서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요셉과 같은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과 가치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성군 다윗입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 다닐 때 그를 배신한 시므이가 독한 말로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임금이나 왕을 저주한 사람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지키던 장수 아비새가 당장 가서 저 놈의 목을 베게 하소서!”하면서 분개하였지만 다윗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만류하였습니다.

(삼하16:10-11)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두 절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이란 말을 두 번씩이나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배신자 시므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 시므이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감옥에까지 보내고 억울한 누명을 씌웠던 보디발의 아내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저절로 살아가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 곁을 떠나가실 때 이와 같은 소중한 약속을 남겨두셨습니다.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들을 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 멋대로 살아가도 되도록 방관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일 받은 말씀과 같이 똑바로 잘 살면 축복을 주시고 배신하고 죄를 지으면 심판하시는 공의로 모든 피조물을 친히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 좁은 육신으로 만사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적인 잣대로 원수 맺고 욕심내며 살지도 말아야 합니다. 요셉과 다윗처럼 용서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사람이 곁에 머물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것이라 믿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요셉처럼 성공하고 출세하는 지름길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공로 없이 만사가 잘 되고 형통하여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 줄 알고 감사드릴 지언정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만사가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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