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2일 주일낮설교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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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Wednesday, 25 September 20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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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約束)
9. 22, 2013
本文:창세기3:8-19
說敎:崔 仁 根 牧 師
지금 한국에서 인기 중에 방영되고 있는 Good Doctor(굿 닥터)라는 드라마에 귀담아 들어 볼 만한 대사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약속이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병원 원장이 그 병원에 핸디캡이 있는 한 의사를 인턴으로 채용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모든 의사들이 다 반대를 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잘난 사람도 줄을 서고 있는데 완벽하지 못한 사람을 자신들의 병원에 채용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장은 그 사람을 채용해서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책임을 지고 병원장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을 하고 간신히 그 핸디캡이 있는 사람을 채용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병원 측에서는 그 병원장과 그 핸디캡이 있는 의사를 몰아내기 위해 갖가지 권모술수를 다 동원해 작업을 벌입니다. 결국 병원장은 그들의 거짓에 휘말려 병원장 직에서 물러나야 할 지경에 처해지고 맙니다. 그 때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는 제자 의사가 병원장을 찾아가 사정합니다. "절대로 병원장직에서 물러나시면 안 됩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병원장은 제자를 설득하며 "핸디캡이 있는 의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약속하였으니 어쩔 수 없다." 합니다. 그 때 제자가 항변합니다. "저렇게 악하게 나오는 사람들 앞에 그까짓 약속쯤은 무시해도 됩니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 때 병원장이 말합니다.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약속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한 마디 말에 참으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병원장을 몰아내고 자기 사람들로 대신 채우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와 거짓이 횡횡하고 있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피해자로 몰려 있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려고 엄청난 불 유익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병원장의 그 아름다운 가치관 앞에서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매우 어렵고 복잡한 것 같지만 실상은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약속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믿음이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힘들고 또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약속이 잘 지켜지고 신뢰가 쌓여간다면 우리들의 삶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는 인생살이가 약속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소중한 약속에 관해 공부해 가면서 약속에 신실한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려 보려고 합니다. 마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행복한 삶을 회복하는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약속(約束)
우리들이 가지고 다니는 성경책도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집대성 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주신 약속은 구약이라고 부르고 최근에 주신 약속은 신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크게 분류하면 단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두 번째로는 그 구원의 방법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그 예수님께서 천국을 준비해 놓으시고 이 땅으로 다시 우리들을 데리러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약속들 중에서 벌써 두 가지는 다 이루어 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들을 데리러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신자가 된 것이고 아직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불신자인 것입니다. 이렇듯 이것이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어렵고 또한 델리케이트(Delicate)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약속에 관한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약속이란 말의 정의
저는 약속을 "관계의 근본"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결혼일 것입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한 사람들이 함께 한 몸을 이루며 관계를 맺는 것이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하는 관계 맺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約婚(약혼)입니다. 이는 곧 "결혼을 약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온 가족들과 친구들 친척들을 다 불러 놓고 그 모든 이들 앞에서 약속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혼인서약입니다. "상대를 만나 오늘 결혼을 하게 되는데 우리 두 사람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면서 가난하게 되거나 병들게 되거나 행복하게 되거나 불행하게 되거나 기쁘게 되거나 슬프게 되는 모든 환경 속에서 사랑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결혼서약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심지어 우리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굳게 다짐하고 출발한 결혼이 왜 파기되고 불행하게 됩니까? 이 굳은 약속이 무너지고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약속은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관계의 근본이 깨지기 때문에 불행해지게 되고 모든 신뢰가 사라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관계 자체가 파기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몸으로 친히 느끼고 경험 하는 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부관계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와 같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 아담에게 동산의 모든 것을 무상으로 주시면서 그 조건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행동 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잠재하고 있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처음 사람들은 하나님과 맺은 이와 같은 중요한 약속조차도 어기고 말았습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인생들은 엄청난 고통을 형벌로 받고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던 그들이 죽어야만 했으며 결국에는 그 아름다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창3:16-19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결국 약속을 어김으로 인해 관계가 파기되는 엄격한 형벌이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들이 오늘 꼭 가슴에 새기며 배워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바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사람됨을 눈으로 보고는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기꾼들일수록, 가짜일수록 더욱 겉을 멋지게 포장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우리들은 늘 사람들에게 속으며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됨을 판단할 수 있는 아주 쉬운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약속을 해 보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약속을 귀히 여기고 꼭 지키는 사람은 일단 믿을 수 있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해 놓고 잊어버리거나 지키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 믿으면 안 됩니다. 약속을 깨뜨리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성실성이 없는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람은 남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의 왕을 세우실 때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테스트해 보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이 테스트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삼상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
삼상13:8-12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사울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무엘을 이용하여 사울 왕을 테스트 해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울왕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일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방식대로 사람의 생각으로 하자면 충분히 사울의 행동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므로 반드시 그 약속대로 될 줄을 확신하고 사람의 머리와 경험과 생각을 동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게 되고 하나님께로 부터도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다윗 왕입니다.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다윗을 또한 시험해 보셨습니다.
삼상26:7-12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되는 그와 같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즉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었기에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다윗을 사울의 왕 위에 앉히시고 사울을 폐위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한 두 분의 삶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목숨을 걸고 지키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이 세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 또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4월 29일은 안창호 선생께서 상해에서 체포된 날입니다. 이 날은 도산선생의 친지 자녀의 생일인데 바로 며칠 전에 어린아이와 약속하기를 "내가 네 생일에 좋은 선물을 사가지고 오마" 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때는 계엄령이 심하여 출입하기가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와 약속한 날이니 아니 갈 수 없다며 좋은 선물을 사가지고 어린아이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도산 선생은 이것이 약속을 지키다가 일어난 일이니 조금도 유감이 없노라도 담당하게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약속이 깨지만 관계도 깨집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안 계시는 것 같지만 계시고 가만히 계시는 같지만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들의 조상들인 아담과 하와가 가슴으로 깨달았다면 이 땅에 이처럼 비참한 심판의 형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형벌 받은 아담과 하와를 보고 배우면서도 그들의 망한 그 길을 서슴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버리신 것과 최초의 왕 사울을 버리신 이유가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속에서 묻어나고 있습니다.
삼상15:26-27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는 말씀과 같이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이처럼 비참하게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그 엄중하신 말씀도 버리고 사탄과 마귀와 짝하다가 그처럼 비참하게 버림을 당하게 된 것과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제 맘대로 했다가 왕위에서 비참하게 버림당하게 된 배경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도 무서운 도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쉽게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정기노회 때 장로님이 되겠다고 피택된 13분의 집사들을 테스트했었는데 그 중에는 이미 다른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을 받고 교회를 옮겨 또 다시 시험을 보러 온 장로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제가 그 때 고시부장으로 면접을 하고 있었는데 그를 보는 마음이 참으로 아팠습니다. 명세기 장로란 그 교회에서 피택을 받고 그 교회에서 안수를 받으면 그 교회에서 죽는 날까지 섬겨야 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장로의 직분은 항존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룩한 성전에서 목사님들이 안수하고 축복하여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서약하고 그 교회의 장로로 세워졌는데 그 교회를 버리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은 심각한 약속 불이행인 것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하는 모든 직분자들이나 결혼하는 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는 좋다고 손을 들고 약속을 하고 언제는 싫다고 그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고 돌아서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만 이와 같이 약속을 파기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의 모든 것을 보시고 또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음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139:1-5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런 분이 지금 우리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마음대로 살면 안 됩니다. 한 번 약속했으면 손해가 와도 어려움이 와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사람이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기회주의자가 되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그 사람이 아간이고 그 사람이 게하시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 줄 알고 육신의 눈이 탐욕에 젖어 아무도 몰래 금덩어리를 숨겼지만 결국은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은 욕심을 내고 약은꾀를 쓴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미련해 보여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귀히 여기며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약속의 신실성과 소중함을 순간순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가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의 후손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이시고 '너의 후손'은 사탄 마귀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사탄 마귀가 예수님께 치명적인 고통을 입힐 것이나 결국 예수님은 그들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므로 최후 승리를 얻게 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직후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 마귀가 예수님의 발뒤꿈치 즉 아킬레스를 치고 형언할 수없는 고통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우리 예수님을 다시 살려내심으로 승리를 거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두 가지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의 약속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추상적이고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주신 약속입니다.
행1:10-11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경거망덕하면 안 됩니다. 약속에 진실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날 동안 약속을 지키며 약속을 믿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서로 한 약속을 진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와 같은 훈련과 이와 같은 변화가 없이는 약속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그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영혼의 양식으로 내려 주신 신, 구약 성경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약속에 진실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와 사울 왕을 거울삼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에 실패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한결같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그와 같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또 다시 반복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길은 약속을 지키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에 진실하고 그 약속에 인정을 받게 되면 다윗과 같이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고 아름다운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에 진실된 성도들을 너무나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오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처럼 약속에 굳게 서서서 하나님의 상급을 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